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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초,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보수 월간지의 어느 기자는 이 서류에 게재된 이 의원의 주소지를 유심히 살폈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 D아파트 X동 Y호. 그는 이 아파트의 동호수가 지난 대선 당시 문제가 되었던 안철수 의원의 옛 아파트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안철수·이석기의 우연한 인연?’이라는 기사를 작성했다.
사실 이 기사는 두 의원의 ‘인연’보다는 그들이 거주했던 아파트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담고 있었다. 안 의원이 이 아파트에 입주한 것은 1988년 말이었다. 당시 26세의 의대 대학원생이던 안 의원은 아파트 입주권을 본인 명의로 구입했다. ‘딱지’로 불리던 입주권 시세는 3000만원 선이었다. 안 의원은 이 아파트에서 4년 동안 거주한 후 어머니 명의의 역삼동 아파트로 이사했다. 사당동 아파트를 처분한 것은 2000년이었고, 당시 매매가는 2억2200만원이었다.
한편 안 의원과 1962년생 동갑내기인 이 의원이 사당동 아파트를 산 것은 부동산 폭등세가 한풀 꺾인 2008년, 그러니까 안 의원이 입주한 지 20년 지난 후였다. 당시 시세는 6억원대로 8년 전에 비해 3배 가까이 오른 가격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아파트가 들어선 사당동 일대는 1980년대 후반 이전까지 ‘달동네’라고 불리던 도시 빈민의 대표적인 거주 지역이었고, 재개발이 본격화되자 철거민들의 저항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많은 빈민들은 쫓겨나야 했지만, 베이비붐 세대 일부는 재개발 덕분에 ‘내집’을 마련하고 중산층 대열에 끼어들 수 있었다. 또한 이 아파트 일부는 서울과 지방의 1920·1930년대생 중상류층의 몫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산 증여와 재테크의 방편으로 재개발 딱지를 사들였다.
안 의원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1990년대만 해도 이 아파트들은 젊은 중산층의 강남 진입을 위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런 분위기가 극적으로 변모한 것은 21세기 초입이었다. 재건축 열풍으로 강남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자 이 아파트들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고립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점이 되자 정치권의 야심가들이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작구 사당동에서 유세 활동을 펼치고 있는 노회찬 후보 (출처 : 경향DB)
이전까지 이 지역은 ‘상도동’의 후광 강도와 유권자의 출신 지역 비율에 따라 선거의 승패가 결정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2004년 이후 ‘서울시장’을 꿈꾸지만 감히 강남에 도전장을 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강남 거주 정치인이나, ‘대권’을 향한 마음에 지역구를 지방에서 서울로 옮기고 싶지만 강남에서의 승부는 너무 시시한 거물 정치인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중산층의 중간 기착지가 유명 정치인의 몸값 상승을 위한 도약대로 변모했기 때문일까? 강남 부럽지 않은 교육 환경 조성과 뉴타운 건설 같은 공약이 지역 유권자의 마음을 들쑤시고 지나갔다.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전개된 것은 이 지역 최후의 승자였던 재벌 2세 정치인이 시장 선거에 나선 이후였다. 공석이 된 지역구를 놓고 여의도고 출신의 1967년생 야당 대변인과 중앙대 학생회장 출신의 1968년생 지역 정치인이 출사표를 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성균관대 학생회장 출신의 1966년생 정치인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앞선 두 경쟁자를 물리치고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여기에 원외에 머물고 있는 노원구의 1956년생 진보 정치인과 중구의 1963년생 보수 정치인까지 가세했다. 노동당의 김종철 후보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이 지역과는 무관한 역전의 용사들이 패자부활전을 벌이겠다며 하나둘 모여든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자 정작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이는 지역 유권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대표자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지만, 실상은 여야 정치인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내건 볼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철거와 재개발, 거품의 역사를 간직한 뜨내기들의 도시, 그런 도시에 거주하는 유권자들에게 ‘정치적 볼모’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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