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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무역분쟁이 첨예해지면서 점점 도드라지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기업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요즘 무역분쟁 관련 언론보도를 보면 조금씩 희망적인 소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앞으로 1년 정도면 우리 기술력으로 이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피해는 일본의 수출 기업에 돌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대표적이다. 관련 기술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실현 가능성을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큰 피해를 입을 줄 알았던 우리 대기업들이 이미 상당량의 재고를 확보해 놓았다든가 혹은 일본이 아닌 제3국으로부터 대체 수입원을 확보했다든가 하는 소식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우리의 글로벌 기업들이 위기에 빠질 뻔한 나라를 구해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여기서 잠시 무역분쟁 이전으로 돌아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위 10대 재벌 중 2016년 국정농단 청문회에 불려나오지 않은 그룹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재벌에 비판을 쏟아부었다. 강력한 처벌과 재벌 개혁, 더 나아가 재벌 해체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 대기업, 특히 재벌은 때때로 모든 악의 근원처럼 비판받는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재벌은 나라를 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이제 차분하게 물을 때가 되었다. 우리에게 재벌은 무엇인가. 무엇이 재벌의 진짜 얼굴인가. 우리의 기업정책은 어디로 가야 하나.

정치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예측 가능하고 생산적인 국가·기업 관계를 설정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견실한 성장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견실한 성장이 없으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진다. 과거 세계 여러 나라의 국가·기업 관계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다. 한국은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가 산업정책을 통해 기업을 이끌어 나가고 금융정책으로 이를 뒷받침하며 수출에 매진하는 발전국가체제였다면, 미국 같은 나라는 기업이 무엇을 하든 자유롭게 내버려두되 몇 가지 시장의 규칙을 어기면 엄하게 처벌하는 규제국가체제였다. 한국에서 과거의 국가·기업 관계는 1987년을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후 3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무엇이 시장의 질서인지 알 수 없는 ‘제도의 공백’ 상태를 이어왔다. 1987년이 기점인 것은 민주화 원년이라서가 아니라 그해 처음으로 재벌이 제2금융권 계열사를 통해 금융에 대한 국가의 지배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고(故) 정주영 회장이 1992년 대선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국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업에 대한 국가의 실질적 견제로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는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제한제도가 1987년에 도입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 후 규제국가체제로 이행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제3의 어떤 질서를 만들어내지도 못한 채 지금까지 왔다. 혼돈의 시장에서 기업은 규모를 키워갔고 그중 일부는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섰다. 정치는 기업의 권력을 인정하거나(노무현 정부),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대가로 기업을 사적으로 이용하거나(이명박 정부), 기업을 협박하거나(박근혜 정부), 기업에 혼란스러운 시그널을 보내왔다(문재인 정부). 지나간 정부들의 기업정책은 그때마다 달라져왔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표가 필요할 때는 반기업 정서에 기대 기업을 적대시하고 경제가 어려울 때는 기업에 손을 내민다는 점이다. 그러니 기업은 살아있는 권력에 머리를 숙이지만 속으로는 비웃는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정치도 기업도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대기업, 특히 재벌에 대한 비판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배구조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대중은 재벌에 대한 반감을 거두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원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들이 하는 어떤 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근본주의적 태도와 글로벌 대기업에 대한 엄청난 의존도가 더 이상 공존할 수는 없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가·기업 관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지 못하고 처벌과 의존만을 번갈아 해왔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는 직무유기 상태이다. 정치가 먼저 실용주의적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 지배구조 문제를 장기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그 밖의 영역에서 기업이 꼭 지켜야 할 시장친화적 규칙들을 확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영역에서는 기업의 혁신을 총력으로 지원해야 한다. 정치가 혼돈의 시장을 계속해서 방치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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