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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8일 지면게재기사-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12월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집회 참여자의 11%가 원래 새누리당 지지자였다. 원래 새누리당 지지자 중에서 지지를 철회한 사람이 60%를 넘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책임을 물은 사람도 50%에 달했다. 새누리당 의원 중 탄핵에 찬성한 사람이 62명이었다. 잠깐이나마 이건 아니라는, 그러니 바꿔야 한다는 정치적 합의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국민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검찰개혁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 조국 사퇴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 이도저도 지긋지긋하다며 염증을 내는 사람.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손민주주의를 치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손민주주의란 정치학자 볼프강 메르켈이 제시한 개념으로, 민주주의냐 독재냐의 이분법을 넘어 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기는 하되 여러 결함을 가진 하위 유형들을 말한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비자유민주주의, 시민권을 제한하는 배제민주주의, 선출되지 않은 자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후견민주주의, 통치자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파트너가 아닌 시민과 직접 연합하는 위임민주주의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한국의 결손민주주의는 무엇보다 대선개입을 통한 선거체제의 훼손과 위헌적 통치행위로 인한 비자유민주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쌓여오던 정치적 압력은 소위 ‘최순실사태’를 통해 밝혀진 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비선실세에게 넘겨준 가장 저열한 형태의 후견민주주의 행태까지 드러나자 마침내 폭발했다.

촛불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는 결손민주주의 그 자체를 치유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그대로 둔 채 선거에 승리하고 적폐를 청산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민주주의에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촛불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시민은 촛불시민이 되었고, 촛불집회는 촛불시민혁명이 되었으며 촛불의 정신을 이어갈 촛불정부가 태어났다. 촛불시민과 촛불정부의 소명은 적폐청산이 되었다. 그러나 과거 한국적 민주주의가 그랬듯이, 수식어가 붙은 민주주의는 온전한 민주주의이기 어렵다. 19대 대선은 결손민주주의를 치유하고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의 장을 여는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우리 민주주의의 허점을 그대로 둔 채 정권교체라는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말았다. 

적폐란 오래 쌓여온 폐단을 말한다. 검찰개혁은 오래 쌓여온 폐단을 청산하려는 시도인 것은 맞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허점을 그대로 둔 채 적폐만 청산하려 하면 민주주의의 또 다른 허점을 드러내게 된다. ‘청와대정부’라는 지적이 보여주듯이, 이번에는 대통령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건너뛰고 국민의 직접적 지지에 의존하는 위임민주주의가 아니냐는 혐의이다. 결국 대통령 지지자들은 지나간 보수정부의 비자유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결손을 지적하고, 대통령 비판자들은 현 정부의 위임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결손을 지적한다. 어느 쪽도 전적으로 맞거나 전적으로 틀리다고 할 수 없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국민들은 촛불과 태극기로 나뉘어 격렬하게 맞선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하나씩 잡고 있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지만 상대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비토민주주의다. 결손민주주의 대 결손민주주의의 대결이다.

아직까지는 중도층과 민주당·정의당 지지자들이 현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지언정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로 옮겨가지는 않았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그들은 차마 지지할 수 없는 정치세력이라는 결론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의 양상을 보면 이 마지막 교두보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어느 순간 현 정부의 결손민주주의나 지난 정부의 결손민주주의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도달하면 역사적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이 속출할 수도 있다. 적어도 이번에는 시간은 대통령이나 조국 장관의 편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단이 필요하다. 개혁의 길은 결손민주주의 대 결손민주주의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의 동력을 얻으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온전한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촛불에 참여했던 옛 새누리당 지지층, 상식의 힘을 믿는 보수층, 탄핵에 동의한 보수 정치세력까지 아우를 수 있는 합의의 정치를 선언해야 한다. 대의제 정치가 엉망이더라도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정치력이다. 촛불민주주의가 아니라 수식어 없는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 서로가 상대의 길을 가로막기만 할 뿐 아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설사 성에 차지 않더라도 다만 몇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하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대통령밖에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 혁명적인 과업을 시도해볼 기회를 가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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