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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일부 대선 주자들이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 검토되고 있는 ‘주 4일제’를 공약으로 언급하고 있다. 노동과 일상의 균형을 회복하여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속도를 늦추어 탄소위기 대응으로도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사회와 경제에서 작업장, 그것도 제대로 규제되고 있는 정규적 작업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도외시한 무리한 주장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진보’ 진영에 깊숙이 뿌리박은 정규직 중심주의가 표출된 극적인 예라고 생각된다.

 

이는 당연히 임금 삭감 없이 노동일만 줄어드는 조치를 뜻할 터이니, 이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은 급격한 실질임금 상승을 얻을 뿐만 아니라 여가 시간의 증가로 인해 ‘워라밸’ 개선 등 화폐로 계산되지 않는 다양한 실질적 소득 상승의 효과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주 52시간 노동도, 최저임금도, 심지어 작업장 안전조차 일률적으로 감시와 규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작업장이 허다한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이러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그 혜택이 제대로 갈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각종 불안정 노동자,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 등에게는 완전히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삶의 불편과 상대적 박탈감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결국 은행, 관공서, 공기업, 대기업, 대학과 학교 등 정규적 작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 돌아가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돌아가는 혜택이 극히 불균등하거나 전혀 없거나 오히려 ‘벼락거지’가 되는 허탈함만 나타날 것이다.

주 4일제 제안은 우리나라 ‘진보’ 진영에 깊숙이 뿌리박은
정규직 중심주의가 표출된 극적인 예라고 생각된다
상위 20% 정규직에겐 큰 혜택을 주고 그 밖의 사람들은
‘벼락 거지’가 되는 허탈함만 나타날 것이고
탄소 배출 준다는 것도 의구심

그나마 일부 사람들에게라도 주 4일제의 혜택이 돌아가면 그게 어디이며 또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노동일이 줄어드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또 정규적 작업장의 정규직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이들이 소득의 감소 없이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는 보완책을 함께 사용하면 된다고까지도 한다. 첫째, 지금 뜨겁게 논의되는 불평등의 간극은 1대 99에서 20대 80으로 이동한 상태이다. 가뜩이나 상대적으로 나은 상태에 있는 상위 20%에게 더 혜택을 주는 사회정책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의 노동일이 줄어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소득이 전반적으로 상승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며, 이는 거기에 역행하는 정책이 아닌가? 둘째, 모든 사람들의 노동시간과 소득을 그렇게 포괄적으로 공평하게 조절할 수 있는 그런 신박한 ‘보완책’, 그런 환상적인 정책은 천학비재의 백면서생인 나로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며 상상하기도 힘이 부친다. 그런 방안과 제도가 있다면, 주 4일제를 차치하고 그것부터 우선적으로 시행할 일이다.

불평등 심화로 ‘정의로운 전환’ 배치

이러한 우리의 조건에서 이 정책이 탄소 배출을 줄여줄 것이라는 주장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첫째, 줄어든 노동시간을 보전하기 위해 큰 비용이 들어간다. 둘째,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현실적으로 기존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정책이므로 ‘정의로운 전환’과는 거리가 멀다. 셋째, 한국의 조건에서 이 조치가 정말로 사회의 시계를 늦추는 효과를 낳을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사회 경제는 이미 주 4일제를 시행한다고 해서 다 함께 멈추어 서는 잘 정돈된 한가한 사회가 아니다. 사람들이 놀 줄 모르고 쉴 줄 몰라서 밤낮으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현재의 분배 구조에서는 도저히 삶의 견적이 나오질 않기에 이를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살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공서와 은행과 학교가 쉰다고 해서 과연 우리 산업사회의 숨가쁜 수레바퀴가 함께 멈추어 설까? 가게도 문을 닫고 택배도 음식 배달도 멈추고 그 바쁜 모든 이들이 갑자기 독실한 유대인들처럼 문 걸어 잠그고 안식일을 보내게 될까? 가설적 주장이지만, 차라리 원자력발전소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게 낫지 않은가? 비록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고 엄청난 지역 불평등을 배태하기는 하지만 탄소 배출을 줄인다는 확실성에 있어서는 이쪽이 훨씬 더 확실하고 뛰어난 정책이 아닐까?

이 ‘주 4일제’ 제안은 우리의 현실을 도외시한 채 유럽이나 서구의 진보정책을 그대로 가져와 ‘쿨하게’ 보이는 데에 집착하는 우리 진보 진영의 버릇이 나타난 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이 진영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은연중에 지배해 온 또 하나의 뿌리 깊은 편향을 본다. 바로 정규직 중심주의이다. 각종 사회 경제 정책을 생각하고 입안함에 있어서 정규적으로 관리되는 작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그 사회를 대표하는 존재들처럼 여겨 이들을 표준으로 삼은 각종 요구를 진보정책으로 제시하는 편향이다.

기존의 예로 정년 연장제, 임금피크제 철폐, 육아휴직 강화 등의 요구를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노동인구 중에서 정년이 보장된 이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정년이 몇 세로 정해지는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같은 이유에서, 임금피크제 철폐는 정년이 보장된 50대 후반의 직장인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육아휴직의 강화는 고용 안정성이 불안한 노동자들,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는가? 사실상 이런 정책과 요구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주로 상위 20%를 더욱 윤택하게 해주는 것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것들이 과연 진보적인 사회 정책이라고 불리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주변의 아픔과 넋두리 불보듯 뻔해

어찌 보면 21세기의 산업사회에서는 ‘마르크스의 시대’가 가고
‘프루동의 시대’가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착시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20세기에서 물려받은, ‘사회는 곧 작업장’이라는 통념 때문이다. 19세기 말의 2차 산업혁명 이후 대공장 체제가 들어서게 되면서 작업장과 생산 단위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커지게 되었다. 이에 좌파 진영(생디칼리슴)이나 우파 진영(기업 국가) 공히 사회를 작업장과 동일시하는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대공장이라는 정규적 작업장에서 노조에 가입되어 있는 정규적 노동자들이 사회 전체의 일반 이익을 대표하는 존재들이라는 대표성을 가지게 된다. 자본 대 대공장 조직 노동자들의 구도는 어느 새 자본 대 사회 일반이라는 구도처럼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GM에 이로운 것은 곧 미국에 이로운 것”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조직된 정규직 노동에 좋은 것은 사회 전체에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마치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진보 진영을 횡행하게 된다.

하지만 21세기 산업사회의 현실은 이러한 관념과는 이미 오래전에 유리되기 시작하였다. 인구 전체에서 블루칼라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1969년 스웨덴에서의 40%를 최고 기록으로 남긴 채 어느 나라에서나 꾸준히 줄어들었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초연결성’으로 인해 생산 과정은 이제 작업장과 완전히 분리되어 전 지구의 곳곳에 스며든 네트워크의 인드라망으로 퍼져버렸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고용 관계의 피고용인이 노동자의 정의라면, 이제 그런 노동자의 개념으로는 생계를 위해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 전체를 절대로 대표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 경제적 궁핍과 삶의 피폐화로 비틀거리고 있는 이들은 그렇게 대표되지 않는 쪽에 압도적으로 더 많다. 이것이 기본소득이나 기본서비스와 같은 대안적인 사회 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어찌 보면 이제 마르크스의 시대가 가고 프루동의 시대가 (되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이 두 사람은 대안적인 산업사회의 모습으로 전혀 다른 상을 제시하여 심한 논쟁을 벌였다. 프루동은 피고용자 혹은 자영업자 등과 같은 법적 형식을 초월하여,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정신적·육체적 능력을 발휘하여 삶을 꾸려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생산자’라는 큰 범주로 포괄하여 이들이 자본의 독점과 횡포에 맞서 서로서로를 도와 협동조합과 은행과 시장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는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반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프루동의 비전을 가게 주인과 같은 소생산자들의 ‘프티 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폄하하면서,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은 사회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공장으로 만들어갈 것이며 이에 임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조직화되어 자본을 철폐하고 생산 전체를 사회화하는 것이 답이라고 주장하였다. 2차 산업혁명과 대공장 체제가 지배했던 20세기의 산업사회에서는 마르크스가 진리요, 프루동은 몽상가로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한다. 21세기의 산업사회에서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프루동의 비전이 훨씬 더 현실에 가까워 보인다. 지금 내 옆에서 힘겹게 헐떡이고 흐느끼며 살아가는 다양한 이름과 직종을 가진 사람들의 신음과 넋두리를 듣는 데에는 후자가 훨씬 더 도움이 된다.

홍기빈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왔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국제칼폴라니 연구협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위기 이후의 경제학>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와 복지국가>가 있으며, 역서로는 <도넛 경제학> <21세기 기본소득> <균형재정은 틀렸다: 현대화폐이론 입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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