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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눈 오는 날 청계천 헌 책방엘 갔다 김종삼 특집 낡은 시 잡지 표지에 이름도 없는 내가 김수영 전봉건 김종문 신동문 김광림 시인과 함께 섞여 내다보고 있었다 움, 무우순, 무순(無順), 번외(番外)라고 금방 끼룩거렸다 성중천(性中天)이 거기 있었다 맨 꽁무니 기러기 한 마리여

그즈음 어느 겨울날 아리스 다방 골목길 과일 가게에서 김종삼 시인이 하얀 손수건 꺼내 조심스럽게 싸들던 홍옥 한 알과 김하림 시인도 이 겨울 생각났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열애 중인 그들이었다

 -정진규(1939~201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시인은 눈 오는 날에 찍었던 옛 사진 두 장을 기억의 서랍에서 꺼낸다. 한 컷은 헌 책방에 들렀던 때이고, 또 한 컷은 과일 가게에 들렀던 때이다.

시인은 책방에 가서 본 잡지의 표지에 자신이 여러 시인들 속에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비록 이름이 다른 시인들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고, 또 밑천도 없는 때여서 자신이 기러기 행렬의 끝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 모임의 한데 섞임에는 배열이나 분류의 차례가 없고, 순번도 없고, 다만 하늘 아래 타고난 마음의 본바탕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었다고 회상한다. 또 하나의 필름에는 홍옥 한 알을 손수건으로 감싸서 들던 김종삼 시인이 있다. 사과를 흰 손수건으로 둘러싸 들어 올렸으니 사과의 빛깔이 더욱 더 선명하게 붉었을 것이다. 눈이 내리던 겨울 어느 날의 풍경들이었다.

재지 않고 터놓고 어울리고, 눈빛에서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서로를 격려하고, 멋스러운 데도 좀 있게 살았던 그 시절의 얼굴들. 열렬하게 생업과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던 때의 사진들이 따뜻하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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