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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면 늘 좋지만 그게 천마산이라면 더더욱 아니 좋을 수가 없다. 꽃에 입문하고 처음으로 찾은 산. 길지 않은 나의 꽃이력을 따져보면 천마산의 한 골짜기로 나의 반질반질한 등산화는 미끄러져 들어간다. 늘그막에 우연히 나의 전부를 투신케 한 취미의 처음이자 바탕 같은 곳이겠다. 그 천마산의 정상 바로 아래의 돌핀샘에 앉아 쑥떡과 커피를 먹는다. 얼마 전 다녀간 첫눈의 흔적 사이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저만치 수피가 울퉁불퉁 발달한 황벽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도 벌써 12월이네, 탄식을 여러 번 들었던 뒤끝인가. 문득 생의 질서가 어수선해지고 삶의 갈피가 헛갈릴 때 나의 근원이 어디일까를 궁리해 보기도 한다. 연말이고 겨울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찬 기운에 편승하여 코끝을 싸늘하게 두드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라서 겨울산에 드니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당장 저 황벽나무의 잎은 뿌리를 찾아서 흙으로 녹아들고, 이 돌핀샘의 물은 빗방울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바다를 찾아 한강으로 내려가는 중!
고등학교 수학시간. 이차함수 문제가 나오면 그림부터 먼저 그렸다. 이른바 x축과 y축을 긋고 0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땐 그래도 꿈과 더불어 연습장에 허술하게 표시한 원점이라도 있었다. 오늘 내가 오른 산도 말하자면 엎어놓은 포물선이고 한발한발 이동한 자취를 연결하면 점근선일 테다. 그렇다면 나도 항상 그 어디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는 중!
황벽나무는 엄청 큰 나무이다. 그 앞에서 나는 너무나 작아서 여름에 피는 노란 꽃이나 가을에 여무는 열매를 지나치기가 일쑤다. 다만 언제나 폭신폭신한 코르크의 탄력을 확인하고 즐기기 위해서 수피를 쿵쿵 쥐어박으며 황벽나무를 구별해 왔다. 오늘은 때도 때이고 이제 나이도 나이니만큼 나무 앞에서 오로지 이 생각만 하기로 했다. 겨울을 알몸으로 앓는 나무 앞에 서면 나무를 木으로 표기하는 연유가 저절로 짐작되는바, 이 나무들 밑으로 들어가 똥막대기(一)처럼 눕게 되는 곳에 나의 근본이 있지 않을까. 그러한 궁리와 함께 황벽나무 아래에서 손가락으로 ‘本’이라는 글자를 허공에 적어본다. 황벽나무, 운향과의 낙엽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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