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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아버지가 군대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사라졌다
실눈을 뜨고
잠에서 겨우 달아났을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사과 깎는 소리
발을 길게 끌며 향기가
둥글게 깎여나가고 있었다
박연준(1980~)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혼백(魂魄)이 와서 제사에 바친 음식을 받아서 먹는 것을 흠향이라고 한다. 이 시에서는 아버지의 넋이 꿈을 꾸는 어렴풋한 동안에 넌지시 다녀간다. 그런데 아버지는 느닷없이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하신다. 군대에 가야 한다고. 시인은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묻는다. 그럼 남은 식구들은 뭘 먹고 사느냐고. 아버지 아니면 누가 생계를 책임지느냐고.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사라져간다.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아버지는 부재하게 된다. 한 차례 찾아온 기억 속의 아버지를 그린 듯한 이 시는 그 여운에 묘한 매력이 있다. 외면하듯 사라져가는, 신발을 끌며 천천히 눈앞에서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과 자취가 둥글게 깎여져 나오는 사과 껍질에 빗대어져 있다. 사과의 향기를 풀어놓으면서 아버지는 다시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다. 아마도 제사상을 물리고 제물로 올렸던 사과를 깎는 식구를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아 이처럼 썼겠지만, 한 존재의 부재에서 생겨나는 애틋함과 회오 같은 감정도 때로는 풋풋하게, 싱그러운 사과 향기처럼 기억된다면 좋겠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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