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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만나는 사람 없냐”는 질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질문은 내 ‘구구절절 버튼’을 누르는 경향이 있다. 나는 몇몇 ‘구남친’들이 내 인생에 끼친 악영향을 구구절절 말한 뒤, 연애로 인한 에너지 낭비와 감정 소모를 더는 원치 않고, 그 시간과 에너지를 규칙적인 운동과 취미생활에 쓰는 지금 삶의 질이 더 높으므로 웬만하면 앞으로도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이야기를 맺었다. 그러자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그럼 노후 대비는?”

나는 얘기가 왜 이렇게 흐르지 싶어 눈만 끔뻑이며 입을 다물었다. 선뜻 질문을 이해할 수 없으니, 즉각 답이 안 나왔다.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대화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고, 화제는 곧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제때 풀지 못한 의아함만이 나와 함께 남았다. ‘연애’와 ‘노후 대비’ 사이에 무슨 맥락이 있었을까? 혹시 그는 ‘연애’라는 키워드를 들으면 결혼, 출산 등의 단어가 자동으로 연상되는 사람이었던 걸까? 그러니까, 결혼과 출산으로 ‘정상가족’을 이루는 일이 곧 ‘노후 대비’라는 맥락이었을까?

세상이 바뀐 줄 알았다가, 가끔씩 “아, 아직 이게 현실인가?” 깨닫는 순간이 있다. 앞에 든 사례도 그렇다. 요 몇 년간 나는 결혼과 출산이 당연한 일이라는 사상과 이에 따른 ‘압박’을 접하기 드물었다. 불쾌한 오지랖은 주로 친척 모임 또는 직장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나는 친척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프리랜서이다 보니 직장에서 한 소리 들을 가능성도 적다. 친구들과의 만남에서도 거의 못 들어봤다. 끼리끼리 노는 법이니까.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쭉 “어떻게든 네 인생 네가 책임지며 살면 된다”고 말해왔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니 실전 대처 능력을 기르지 못했나 보다. 다음번에 비슷한 일을 또 겪으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생각을 멈췄다. 그냥 이런 거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 되잖아? 그러니까, 한국 사회가 바뀌면 되잖아?

아직도 한국에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다.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로 이뤄진 가족 구성원 각각이 ‘전통적’ 역할을 수행하리라 기대하고 강요하는 이 사상에 따르면, 부양이나 돌봄은 마땅히 가족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수술을 받으려면 가족의 동의서가 필요하고(1인 가구는 어쩌라고?), 병실에 입원하면 가족이 상주하며 돌보는 게 ‘정상’인 까닭이다. 내게 질문을 던진 사람의 의도 역시 ‘노인이 되면 아플 일 많을 텐데 가족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맥락이었던 것 아닐까.

그러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해롭다. 손정우에 대한 2심 선고를 보며 다시금 느꼈다. 손정우는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의 운영자다. 이곳에서 아동 포르노를 내려 받은 일부 미국인들이 징역 5∼1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는데, 운영자 손정우는 한국에서 달랑 1년 반을 선고받았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한몫했다. 재판 중 결혼한 손씨에게, 처자식을 부양하라며 감경해준 것이다. 언뜻 아내와 자식을 생각한 것처럼 볼 수 있겠지만, 진정 이들을 생각했다면 감경은커녕 손씨와 분리시켜야 마땅했다. 도대체 판사님들은 왜 그러지? 손씨뿐만이 아니다. 다른 아동성범죄자들도 감경 사유에 ‘부양’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동성범죄자들에게 아동 양육을 맡기는 건 지극히 위험하다는 상식을 판사님들은 정말 모르는 건가?

한국은 저출생 국가다. 이미 태어났고 태어날 아이들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이들 모두를 소중히 육성하기 위해 계급에 따른 교육 격차를 줄이고, 가정 학대를 예방해야 한다. 부양과 보육과 교육을 가족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다른 돌봄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를 잘 돌보며 살기 위해서는 정상가족 바깥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1인 가구인 사람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가족과도 연락이 닿지 않을 경우, 휴대폰 단축번호 1~3번으로부터 수술 동의서를 받을 수 있다든지…. 한국 사회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애쓰는 것이 1인 가구인 나로서는 가장 좋은 노후 대비책으로 보인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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