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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이른 아침, 나는 엄마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잠이 깼다. 엄마는 다짜고짜 다 큰, 아니 중년이 된 딸에게 지금 어디냐고 물으셨다.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식의 생사를 확인한 사람은 우리 엄마만은 아닐 것이다. 그날 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156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피지도 못하고 무참히 꺾여 버렸다.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걷다가 죽을 수 있는가. 이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너무도 어이없는 이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누구라도 갈 수 있었고, 누구라도 당할 수 있었던 평범한 일상 속의 죽음이었다. 정말 아찔하다. 나의 생존은 기적이 아닌가.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하물며 자식을 잃은 부모는, 유가족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까. 얼마나 억장이 무너질까.

정부는 왜 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 충분히 예상됐는데도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경찰을 보내지 않았는가. 경찰은 왜 압사의 위험을 알리는 112신고 전화를 11번이나 받았는데도 무시하였는가. 충분히 막을 수 있었고,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정부는 주최자가 없는 행사이므로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경찰은 집회가 아니면 시민을 통제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더니 중립성 운운하며 참사가 아닌, 사고라고, 희생자가 아닌, 사망자라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경찰이 미리 배치되었어도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광화문 집회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말. 이태원의 핼러윈 행사를 축제가 아니라 ‘현상’이라고 규정하고 나 몰라라 하는 용산구청장의 말. 외신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책임을 묻는 기자에게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총리의 농담. 참사가 난 비좁은 골목을 보고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단 말이야?’라는 대통령의 한가한 말. 이 무책임하고 소름 돋는 말들을, 유가족의 상처투성이 가슴에 다시 한 번 비수를 꽂는 이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공직자는 국가 기관이나 공공 단체의 일을 맡아보는 직책이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들이 수많은 사상자가 났는데 어떻게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일까. 그들은 자신이 맡은 자리의 엄중한 책임을 알고는 있는 것인가. 그들은 왜 그 자리를 탐했고 왜 차지했을까.

공동체의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사람과 권력을 좇는 사람. 전자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자리를 통해 사적인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다들 말은 공적인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위기의 순간 본색이 드러난다. 안타깝게도 이 정부를 이끌어 가는 핵심 공직자들은 후자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책임한 말을 저렇게 무심하게, 저렇게 무정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나라는 또다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킬 의무를 저버렸다. 바야흐로 개인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국가와 공적 시스템을 믿을 수 없기에, 나의 안전과 생존은 철저히 나의 책임이 된다. 그런 사회에서 배려와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경쟁과 불안뿐이다. 걷다가 죽을 수 있는 나라, 운이 좋아야 살아남는 나라. 이것이 대한민국의 슬픈 민낯이다.

이태원에 놀러간 희생자를 탓하거나 엉뚱한 토끼머리띠 참가자를 찾으며, 참사의 원인을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지 마라. 단언컨대 10·29 참사는 세월호 참사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국가의 책임이다. 막막한 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할 때, 비좁은 골목에서 뒤엉킨 젊은이들의 숨이 멎어 갈 때, 국가는 없었다.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연재 | 문화와 삶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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