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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1920년 방정환 선생이 외국 동시를 번안하면서 처음 사용한 이래 어린이날 선포, 월간 ‘어린이’ 발간 등을 통해 점차 일반화된 어휘이다. 근대 계몽운동의 대상이자 주체로서 강조된 ‘소년’과 비교할 때, 어린이라는 말에는 윤리적,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난 완전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린이를 뜻하는 한자는 유(幼)이다. 한 가닥 실의 모양을 본뜬 요가 작다, 약하다 등의 뜻이고 여기에 역(力)을 더한 유(幼)는 힘이 약한 아이를 가리키는 글자가 되었다. 2500년 전에 나온 <주례(周禮)>의 백성 양육 정책이 자유(慈幼)와 양로(養老)로 시작된다는 사실에서, 연약한 존재인 아이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인식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幼)가 대개 노(老)와 함께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사용되는 데 반하여, 방정환 선생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어린이’는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한 인격 존재임을 부각하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어린이날이 있는 5월과 가장 먼 계절인 11월에 방정환 선생을 떠올리는 것은, 11월9일이 그분이 태어난 지 120년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문화예술인이기도 한 선생은 1918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재학 시절 연극 <동원령>을 각본, 연출하여 공연하였고, 이듬해에는 최초의 영화 잡지인 ‘녹성’을 창간하기도 했다. 이번주에 탄생 120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100년 차이가 나는 후배들이 <동원령>의 연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계몽과 독립이 급선무이던 시절,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선언은 낭만적인 이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 지금 우리 사회는 어린이를 지나치게 떠받들고 있으니 어린이날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 아니냐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공부 경쟁에 내몰린 채 스마트 기기에 영혼을 빼앗긴 어린이들을 보며,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가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라는 방정환 선생의 당부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100년 전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라는 낯선 말을 보급하며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 냈다. 지금 우리는 ‘어린이’라는 낡은 말을 다시 음미하며 그 무한한 가능성에서 우리의 ‘살길’을 찾을 때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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