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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이 최근 발표한 <영자>라는 소설을 읽었다.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구준생(9급 공무원 시험 준비생) 남자 주인공과 동거하는 여자 ‘영자’의 이야기다. 영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한편 1인분이 최소한 10만원이 넘는 강남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화장실 담당으로 일하며 한 시간에 6000원을 받는다. 영자의 일은 화장실 앞에서 지키고 서 있다가 손님이 용무를 마치고 나올 때마다 ‘변기 밑에 눌어붙은 배설물을 솔로 닦아내고 물 위에 단풍잎을 띄우는’ 것이다. 변기의 물 위에 단풍잎이 떠 있으니 화장실에 들어선 손님은 ‘깊은 산속의 맑은 옹달샘 위에 걸터앉아’ 있는 기분으로 용변을 볼 수 있다. 영자의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단풍잎을 따로 걸러내도록 특별 제작한 변기 파이프에 걸리지 않을 작고 여린 단풍잎을 찾아 주워가는 것도 포함된다.
소설적 상황에 기반해 두 개의 계산을 해봤다. 노량진에서 강남까지 전철로 1시간쯤 걸린다고 나오니 영자의 왕복 출퇴근 시간은 2시간, 공원에 들러 단풍잎을 주워가는 시간은 시급에 포함되지 않으니 제외하면 아마도 영자의 유급 노동 시간은 6시에서 11시, 하루 5시간 정도일 것으로 짐작된다. 일당 3만원이다. 레스토랑은 월 추가 비용 60만원으로 ‘명품 아이디어로 인터넷에 소개되는 단풍잎 화장실’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셈이다. 하루 5시간의 유급 노동을 제공하기 위해 2시간 반 이상의 시간과 왕복 교통비를 덤으로 지불해야 하는 노동자 입장에서 한 달 60만원은 과연 많은 돈일까? 소설의 상황에 따르면 그나마 많은 돈이다. 소설 속의 영자는 두어 달에 한 번쯤 일이 바뀌고, 서너 가지 알바를 병행하고 있으며 노량진 김밥집에서 시금치, 계란프라이 등의 식재료를 다듬는 시급 4500원의 김밥 보조로 일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이 화장실 알바를 구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경영자라면 테이블당 최소 20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려줄 손님들을 위해 하루 3만원의 아르바이트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영자 입장에서도 1500원이나 시급을 많이 주는 데다 상대적으로 일이 쉬운 이 화장실 알바가 나을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분명 그렇지만, 식당 화장실 알바가 더 힘든 알바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노동의 성격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이 찜찜함은 무엇일까. 이 노동을 제공해서 번 돈으로 버티고 노력해서 획득하고자 하는 일상은 어떤 것일까?
소설에 따르면 ‘시장한 구준생 백여 명이 컵밥 노점 앞에 줄을 선다고 할 때 그중 1.3명 정도가 9급 시험에 합격’한다. ‘경쟁의 틀에 갇혀 있는 자들을 모두 똑같이 만들면서 차별하는’ 경쟁률을 뚫고 공무원이 되면? 먼저 합격한 남자 주인공은 5급 중앙 사무관이 된 같은 마을 출신의 청년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만들어 거는 일 외에도 ‘이것저것 다 하는’ 면사무소 총무계 서기보로서의 일상을 얻는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 고시촌에 한 경찰고시 학원의 강좌 개설 안내문이 나붙어 있다. (출처 : 경향DB)
사실 소설 속의 노량진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최근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바로 “버티라”는 말이다. 상황도, 장소도, 말을 꺼낸 사람도, 참석자도 다 달랐는데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하고, 그때마다 좌중의 광범위하고 전폭적인 동의를 얻어내는지 놀라웠다. 다섯 번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많은 영자들은 ‘그래도 살 만한 인생’인 직장인 ‘미생’으로서의 일상을 꿈꾸며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을 테고, 그 일상을 획득한 남자 주인공은 며칠 전 종영한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처럼 “이왕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데야”라는 상사의 충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소설은 “지금 거신 번호는 고객님의 요청으로 사용하지 않는 번호입니다”라는 영자의 휴대폰 기계음 대답으로 끝난다. 힘겨웠던 2014년을 견딘 사람들의 일상이 오차장의 말처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길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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