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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21세기의 첫 십 년은 ‘명품’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떠올려 보면, 명품이란 단어는 최상의 품격을 갖춘 대상을 수식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약간, 이상한 모양새였다. 사람들이 ‘명품 도시’부터 ‘명품 각선미’까지 별 고민 없이 최상급의 매김말로 사용하자, 이 단어는 정보량 제로의 ‘싸구려 관용어’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대상의 특질을 포착하려는 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외려 단어 사용자의 태만함만이 묻어날 뿐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980년대만 해도 ‘명품’의 의미는 사전적인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청자 명품전’ 같은 용례가 일반적이었다.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1990년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이 개장과 함께 ‘명품관’의 문을 열면서부터였다. 해외 고급 패션 브랜드의 제품을 ‘명품’으로 호명하는 홍보 전략의 출발점이었고, 당시 국내 유명 디자이너가 운영하던 부티크의 단골들이 이 전략이 노린 주요 고객층이었다. 중산층은 애당초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이제 막 1인당 소득 5000달러의 문턱을 넘어선 시기의 중산층에게 ‘명품’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호화 사치품’에 불과했다.
강남의 부촌 일대에서 맴돌던 ‘명품’이라는 단어는 얼마 후 세력 확장의 기회를 맞이했다. 1993년, 삼성그룹이 “국제 경쟁력의 획기적인 개선”이라는 경영 목표를 내세우며, 그 실천 전략 중 하나로 “전 계열사 1사 1명품 생산체계 확립”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 ‘명품화’ 전략은 당시 이 기업이 제조업 분야에서 처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기업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는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전자는 3만명이 만든 물건을 6000명이 하루에 2만번씩 고치고 다닌다”며, 2류 수준의 “비효율 낭비적 집단”이라고 혹독한 자체 평가를 내놓은 바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명품은 “초일류 품질의 공산품”을 의미했던 것이다.
1994년, 드디어 이 전략은 나름의 첫 결실을 맺는데, 그 주인공은 컬러TV였다. 삼성전자는 그해 8월, “일반 브라운관 방식의 월드베스트 TV를 개발했다”고 발표하면서, 이 제품에 ‘명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이 이름은 이 기업의 TV 브랜드명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렇게 1990년대 전반에 걸쳐 ‘명품’이라는 단어는 해외 고급 패션 브랜드와 최고 품질의 공산품 사이를 오가고 있었지만, 아직 일반인의 일상 언어 차원으로 침투하진 못한 상태였다. 이 단어가 도약의 시기를 맞이한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였고, 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삼성이었다. 이 기업은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명품’의 의미망을 신축 아파트에 덧씌우려고 시도했다. 1999년에 분양된 타워팰리스가 그 서막이었다.
이 주상복합 아파트가 세워진 도곡동 일대 부지는 본래 삼성물산이 102층짜리 본사 사옥을 짓기 위해 서울시로부터 매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대로 사옥 신축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외환위기 직후였다. 유동성 확보를 위해 토지를 매각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끝났지만, 정부가 상업용지 관련 각종 규제 정책을 완화하자, 삼성물산은 “명품 아파트를 건설하라”는 그룹 총수의 독려를 받으며 분양가 총액 1조원대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설했다.
다양한 과정을 거치며 명품은 중산층들에게도 동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잡는다. (출처 : 경향DB)
‘명품’이라는 단어의 21세기적 의미는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치며 점차 완전한 모양새를 갖춰갔다. 해외 고급 패션 브랜드, 최고 품질의 공산품, 고분양가 아파트를 꼭짓점으로 삼아 작도된 의미론적 삼각형. 그것은 이전까지 ‘호화 사치품’으로 분류되던 재화가 그 부정적 어감을 희석하고 중산층 고객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으로 자리잡았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첫 십 년, 카드 연체와 부동산 거품과 가계 대출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명품’의 시대가 그렇게 화려한 불꽃놀이를 시작할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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