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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니 지나간 한 해를 회고하거나 새해를 전망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이 지면을 빌려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 다시 돌아보았다. 그 시점에서는 나름대로 가장 중요한 현안이라고 생각했던 내용들이니 모아놓고 보면 한 해를 회고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는 4·15 총선을 앞두고 위성정당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양대 거대정당의 꼼수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개정선거법의 정신을 팽개쳤고, 중도 혹은 소수파 유권자의 권리를 빼앗았으며,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라진 망국적 분열상을 그대로 국회로 옮겨왔다. 그 당시 나는 “20대 국회가 역대 최악이라고 했던가. 21대 국회는 그 이상을 보여줄 것임이 확실하다”고 썼다. 그 예상은 별로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거대여당이 상임위원장 자리를 싹쓸이하는 정치, 야당의 동의 없이 선거법이든 공수처법이든 원하면 언제든 통과시키는 정치의 실종은 20대 국회를 뛰어넘는 참상이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코로나19와 정치, 그리고 국가의 관계이다. 코로나19는 무엇보다 가장 먼저 정치적으로 소비되었다. 총선을 앞두고 야당과 보수언론은 코로나19 확산의 책임을 정부의 무능과 대중국 굴욕외교 탓으로 돌리며 대대적인 선전전을 펼쳤다. 그러나 뜻밖에 총선에 가까워지면서 한국 방역의 성과가 세계적인 모범이 되어버리자 총선은 하나 마나 한 것이 되어버렸다. 여당은 180석이라는 초유의 의석을 길 가다 주웠고, 야당은 자신들의 선전전이 역발진한 결과여서 어디 호소할 데도 없게 되었다.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국민들의 목숨이 걸린 재난 상황에서도 정치논리가 우선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따져야 할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되돌아온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이다. 3차 재난지원금이 곧 지급될 예정이고 5차 추경까지 논의되는 마당에 국가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다. 국민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걷어가고 있고 앞으로 그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을 예정이다. 거대국가는 마음먹기에 따라 그 엄청난 자원을 국민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데에 쓸 수도 있고, 비효율적으로 낭비할 수도 있다. 이미 그런 조짐은 일부나마 보이기 시작하는데, 야당이 한국판 뉴딜을 놓고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는 모습을 본 국민은 없을 것이다.
넷째는 K방역을 넘어서는 기회의 창을 열자는 호소였다. 언젠가 대부분의 국가는 방역에 성공할 터이니 우리는 그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민주주의 국가들이 포퓰리즘의 정치로 방역에 실패하고 의료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왔을 때,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과학에 대한 획기적 투자 및 데이터 사용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오늘날 과학의 발전은 데이터에 기반하는데, 한국을 비롯한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과학의 필요성과 데이터 사용의 비민주성이라는 딜레마에 발목이 잡혀있었다. 코로나19는 좋든 싫든 데이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 코로나19 이후에도 아마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민주적인 데이터 사용의 원칙과 실제를 선도함으로써 포스트 코로나 시대 민주주의를 정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것은 이와 같은 과감한 미래 개척보다는 어떻게든 K방역의 성과를 지키려는 몸조심이다.
다섯째는 부동산정책에서 드러난 납세자 권리의 박탈이다. 24번이나 남발된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하나하나 지적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일관되게 발견되는 정치적 위험요소는 납세자 권리의 박탈이다. 국가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주권자인 국민의 동의를 얻고 그들이 기꺼이 국방이나 납세 같은 의무를 다할 때 비로소 국가가 성립한다. 세금은 납세자의 동의하에 부과돼야 하고 납세자는 세금을 내는 만큼 정치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일방적일 뿐 아니라 납세자를 비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다. 합의 여하에 따라 세금을 올릴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납세자 존중 없는 공격적 세금 인상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돌이켜보니 2020년은 적대적 정치의 과잉과 민주주의의 위기,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못한 기회의 아쉬움 같은 것들로 요약되는 것 같다. 2021년은 4월 보궐선거와 그 이후 급물살을 타게 될 대선으로 휩쓸려 갈 것이다. 코로나19는 백신 보급 단계에서 또 한 번의 반전을 가져올 가능성이 충분하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사람들은 진보나 보수가 아니라 아직 깨어있는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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