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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소중한 거니까 서명해줘요.” 몇 달 전 주말 아침, 집주인이 문을 두드리며 서명을 요청했다. 낙태죄 폐지에 반대한다는 서명에 동참해달라는 것이다. 단호하고 분명한 이유 앞에 동거인의 난처한 음성이 들린다. “아, 그러니까… 저는 의견이 다른데요.” 집주인은 의아하다는 듯 재차 생명의 소중함을 설득하다 포기한다. 우물쭈물 거절하는 파트너가 답답해 뛰쳐나가려는데 몇 가지 생각이 발목을 잡는다. 세입자에 대한 집주인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싶지는 않았다. 안정된 주거에서 안심하고 살 권리와 낙태죄 폐지가 이렇게 맞닥뜨릴 줄이야…. 법적 혼인 여부, 성 경험, 낙태 경험 등을 어떤 사회적 기준으로 어떻게 해석할지 내 마음엔 불안이 지펴진다.

봄알람, 페미당당, Women on Web 주최로 8월 26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에는 낙태죄 페지에 찬성하는 125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김영민 기자

소중하다는 그 생명은 어떤 생명일까? 2012년 헌법재판소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대립되는 문제로 판단하며 낙태죄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한국 사회는 1970년대 국가 발전을 위해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으로 피임과 불임 문제에 개입해왔다. 여성이 선택권을 행사해온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익을 위해 여성의 몸을 통제해왔다. 발전과 성장이라는 가치는 장애인을 비경제적인 인구로 구분했다.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 14조 1항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는 장애인의 낙태를 허용하는 근거조항이 되어 여전히 재생산 권리를 통제하고 있다.

미등록 이주민과 난민은 출산 등록 자체가 어려워 미등록 이주아동 수는 집계조차 되지 않은 채 철저히 제도 밖에 놓여 있다. 미성숙한 존재로 성적 권리를 통제당하는 10대의 임신과 출산은 사회문제화되면서 보수적인 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낙후된 정책으로 이어져왔다. 정상가족 중심의 입양과 출산·양육 정책에서 성소수자, 한부모 가족, 비혼모는 차별을 받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열악한 이들의 다자녀 출산은 무책임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재생산이 자연스러운 생명의 잉태와 탄생이고, 낙태는 이를 거스른다고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재생산은 이미 산업화된 의료기술 시장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산전검사, 선택적 임신 같은 의료기술은 장애아를 감별해 태어날 가치가 있는 건강하고 좋은 생명을 ‘선택’하도록 부추긴다. 형법 269조는 낙태의 죄를 여성에게 물음으로써 재생산을 통제해온 국가와 의료권력, 젠더권력, 사회경제적 불평등, 성적 규범, 정상성 등과의 공모를 감춘다.

9월28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 중절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맞아 9월29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주최한 낙태죄 폐지 퍼포먼스에 300여명의 시민이 모였다. 함께 활동하는 장애여성 동료들과 퍼포먼스에 참여하면서 형법의 낙태죄 폐지와 모자보건법 전면 개정이 장애인과 모두의 재생산 권리를 위한 일임을 외쳤다. 어떤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경합을 멈추고, 국가는 국가 발전과 인구 관리라는 명목으로 여성과 수많은 소수자의 성적 권리를 통제해온 역사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낙태죄 폐지는 생명을 선택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생명과 존엄한 삶을 모두가 평등하게 누리고 있는지를 묻는 정의로운 싸움이다. 형법 269조, 낙태죄를 폐지하라.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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