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으로 망가진 회사를 다니고 있는 친구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회사가 퇴행을 거듭하는 동안 친구의 일상은 확 달라졌다. 그림 그리기, 서예, 요리 등 각종 취미생활을 섭렵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라도 다른 짓을 하면서 버티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회사를 다니기 힘들다며 웃는데, 그 덤덤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 열정 넘치던 신입은 사라지고, 못 볼 꼴을 많이 본 자의 씁쓸함이 가득했다. 회사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면 바로 징계다. 저항하는 자는 제거되고, 따르는 자는 이익을 얻으며, 시스템이 그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때 개인이 버티기란 쉽지 않다. 말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무력함에 순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핵심이니까. ‘블랙리스트’도 비슷하다. 다들 심증은 ..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의 비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른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것은 기본이고,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 사업에서 특정 기관을 탈락시킨 정황까지 나왔다.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대선에 불법 개입한 혐의로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형사처벌까지 받았지만 국정원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 국정원, 시민 아닌 정권에 봉사하는 국정원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적이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국정원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일탈 행태 시정 필요’ 문건에는 지방자치단체 산하의 문화재단들이 좌편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감사 등을 거쳐 보조..
당시 사무관 ㄱ씨의 표정은 어두웠고, 눈빛은 다소 지치고 불안해 보였다. ㄱ씨는 서류가방에서 꺼낸 파일을 매우 조심히 은밀하게 다뤘다. 제대로 펼쳐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엑셀 파일을 프린트한 서류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ㄱ씨는 급기야 한 카페에서 불만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배들도 ‘이런 것’은 처음이어서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앞으로 지침에 따라 어떻게 문화예술 현장에서 적용할지 걱정된다는 얘기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사무관 ㄱ씨는 상급자에게서 건네받은 그 리스트를 산하기관 현장에 가져와 전달하고 적용토록 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들을 각종 지원공모에서 떨어뜨려 배제시키려면 최종 심사 결과를 조작해야 하는 난관이 있었다. 수십명, 수백명도 아닌 수천명의 사람들을..
나흘 만에 돌아온 집과 농장은 참 고요했다. 가을색은 더 깊어져 있어서 곱게 늙어가는 귀인처럼 애잔해 보였다. 서울에서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12일 밤 11시쯤 광화문광장 주무대에서 진행된 ‘시민자유발언’ 시간이었다. 전혀 가공되지 않은 생목소리들에 나는 압도당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것으로 보이는 여성 연극인이 무대에 섰다. 주어진 3분 동안에 쏟아낼 말들은 너무 많았고 쌓인 울분은 산을 이루었다. 작품과 공연이 거부되었던 그 예술인의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은 얼굴 전체를 큰 눈물덩어리로 보이게 했다. 예술인들의 자유혼을 짓누르고 고통을 기획한 당사자들을 지목했다. 조윤선 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직접 거명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동자가 올랐다.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보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