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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무관 ㄱ씨의 표정은 어두웠고, 눈빛은 다소 지치고 불안해 보였다. ㄱ씨는 서류가방에서 꺼낸 파일을 매우 조심히 은밀하게 다뤘다. 제대로 펼쳐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엑셀 파일을 프린트한 서류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ㄱ씨는 급기야 한 카페에서 불만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배들도 ‘이런 것’은 처음이어서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앞으로 지침에 따라 어떻게 문화예술 현장에서 적용할지 걱정된다는 얘기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사무관 ㄱ씨는 상급자에게서 건네받은 그 리스트를 산하기관 현장에 가져와 전달하고 적용토록 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들을 각종 지원공모에서 떨어뜨려 배제시키려면 최종 심사 결과를 조작해야 하는 난관이 있었다. 수십명, 수백명도 아닌 수천명의 사람들을 합법적인 과정으로 제외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20대의 젊은 사무관 ㄱ씨는 2015년 가을 대학로에서 그렇게 자신의 책무와 무언가 불의하다고 느껴지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사무관 ㄱ씨의 사례는 해당 문체부 산하기관에서 근무한 전직 관계자가 경향신문 기자에게 증언한 내용이다. 사무관 ㄱ씨는 현재 세종시 문체부 청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8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왼쪽 사진)과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오른쪽)이 피의자 조사를 받기 위해 박영수 특별검사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

거대한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하나둘 진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가 TV로 중계될 때마다 거짓말하려는 자들과의 진실공방을 지켜본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문체부 장관 등 핵심 관계자들은 여전히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정황은 특검에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문체부의 전·현직 장관과 차관, 국·실장들이 줄줄이 참고인이나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되고 또는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비밀스럽게 다뤄졌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블랙리스트와 관련 있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핵심 고위직뿐 아니라 몇년차 되지 않은 젊은 사무관까지 ‘거대한 블랙의 소용돌이’에 가담돼 있다. 공무원뿐 아니다. 민간인들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지역의 작은 교육기관 인문학 강좌 담당자조차 국정교과서에 반대 서명을 한 강사들을 깨알같이 걸러냈다. 정부 예산이 1원이라도 집행되는 곳이면 작품이든, 사람이든, 프로그램이든, 간행물이든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블랙리스트는 권력과 탐욕에 눈먼 자들의 손에서 시작됐지만 현장에서 ‘피를 묻힌’ 실무자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업무공간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최소 1~2년간 지속적으로 실행했다. 그들이 스스로의 이성적 판단을 내면 깊은 곳에 밀어넣은 채 비정상적인 업무를 침묵하며 수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를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부역자’를 양산한 박근혜 정권에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유대인 학살 핵심 책임자로 재판받은 아이히만을 두고 아렌트가 정의한 ‘악의 평범성’은 이후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여하튼 ‘평범성’이란 단어가 취재 현장에서 만난 적지 않은 부역자들의 평범한 모습들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 관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문체부 ㄴ씨는 예의 바르고 성실한 인물로 평판이 나 있었다. ㄴ씨는 최근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마지막 공무수행 때도 겸손한 자세로 제 역할을 했다. ㄴ씨는 취업을 위해 여러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고, 나중에는 죽을힘으로 공부해 고시에 합격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또 다른 관계자 ㄷ씨는 평소 느지막이 시작한 피아노 연주를 자랑하길 좋아했다. ㄷ씨는 평범한 사람들도 열정만 있으면 음악이든 뭐든 새로 시작해 삶의 성취와 즐거움을 이룰 수 있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ㄱ씨, ㄴ씨, ㄷ씨 그리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이 시대를 지나고 있을까. 일상에서 이뤄진 ‘악의 평범성’은 특별하지 않다는 그 특별함 때문에 더 두렵게 느껴진다.

블랙리스트의 어두운 장막이 명명백백히 거둬진다고 해도 우리 사회가 경험한 비이성적인 인식과 행위의 잔해가 어딘가에 살아남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을 때 불현듯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되는 것은 아닐까. 문체부는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대국민사과’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 모두를 “범죄의 시대”에 몰아넣은 이들에 대한 확실한 단죄만이 두려움을 몰아낼 것이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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