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는 일주일씩의 시차를 두고 찾아왔다. 이주일 전, 갑자기 남편이 복통과 몸살에 시달렸다. 일주일 전 아이가 비슷한 증세를 보이더니,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지난 주말, 마침내 나에게도 오한과 복통이 찾아왔다. 왜 놀아주지 않냐며 성화인 아이로부터 누워 쉴 시간을 쟁취하는 동안 지난 2주간 나의 무심함이 빚어낸 풍경들이 보였다. 아픈 남편이 안쓰러운 한편, 병마로 상실된 남편의 노동력을 내가 메꿔야 하자 슬쩍 짜증이 치밀기도 했던 것, 아픈 아이가 떼쓰자 버럭댄 것. 그 순간이 한없이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아프니까. ‘누워 있는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른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중국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건강한 나라와 병의 나라에 동시에 속한 시민으로서의 이중국적이다”라고..
11월10일 여성들은 “당신이 바뀔 때까지 #미투는 멈추지 않는다”고 천명하기 위해 또다시 거리에 섰다. 사회 곳곳에 스며 있는 성차별·성폭력의 구조를 바꾸라는 수많은 여성들의 용기 있는 증언을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는 국가와 사회에 다시 한 번 변화를 촉구했다. 미투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성차별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미투 운동은 끝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연초 폭발적인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정부와 국회는 다양한 정책과 법·제도 개선책을 내놨다. 그러나 한 해가 다 간 지금 바뀐 것은 거의 없다. 우리 사회에 성차별·성폭력이 해결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현실만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다. 아는 것만으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없다. 잘못된 법과 제도, 문화를 고치..
드라마 의 남자 주인공은 구한말 노비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였다. 이방인인 그는 이 질문이 고통스럽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다’는 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는 내 땅인데,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뜻이다. 익숙한 논리다.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편을 갈라 주고받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 노래가 시작이었을까.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 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問),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
“내 차에는 각시만 태운다.” ‘미투’ 운동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와중에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이렇게 고백했다. 지난 대선에서 ‘돼지발정제’로 곤욕을 치른 그로서는 불똥이 튀지 않도록 사전 방어막을 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부인과 사별한 후 가사도우미를 남성으로 교체한 것과 비슷한 심리라고 하겠다. 성폭력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기 위해 여성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펜스 룰’이 사회현상으로 번질 태세다. 회식이나 출장에서 여성들을 배제하고, 여직원을 대면하지 않고 사내 메신저로 업무지시를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자기들만 피해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일부 남성의 이기심의 발로일 뿐이다. 이렇게 하면 성폭력 피해는 줄어들지 모르지만 여성들이 또 다..
진즉에 바꿨어야 했던 악폐가 악폐로조차 인식되지 않는 사회에 대해 여성들이 #MeToo를 통해 ‘변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개인의 피해를 말하는 방식이지만 여성들은 ‘몇몇 괴물이 아닌 구조를 바꾸겠다’고 나섰다. 지난 2월22일(현지시간), UN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제8차 한국정부보고서 심의가 있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8개 부처(여성가족부, 법무부, 고용노동부, 교육부, 외교부, 보건복지부, 인사혁신처, 경찰청) 대표단이 참여했다. 나는 한국정부 심의 대응을 위해 꾸려진 NGO 참가단 일원으로 현장에 있었다. 여러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많은 CEDAW 위원들이 한국의 여성인권 상황을 우려하며 한국정부의 해결 의지에 대해 질타했다. 현장에서 느낀 CEDAW 위원들의 분노 ..
“끝없는 미투 폭로… 문화행사 차질로 시민도 피해자.” 뉴스를 보려고 TV채널을 돌렸다가 화면에 찍힌 자막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앵커의 말이 이어졌다. “전국 각 분야에서 미투 폭로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명 문화예술인들의 성추문 폭로로 문화예술 행사도 차질을 빚으면서 성폭력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피해를 보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못 가린다는 탄식이 절로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제는 고통을 말할 자유도 없구나. 저 앵커와 기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성폭력 피해가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시민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말일까? 아무리 새겨들어도 미투 폭로가 가해자 아닌 애먼 시민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익숙한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