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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미투 폭로… 문화행사 차질로 시민도 피해자.” 뉴스를 보려고 TV채널을 돌렸다가 화면에 찍힌 자막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앵커의 말이 이어졌다. “전국 각 분야에서 미투 폭로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명 문화예술인들의 성추문 폭로로 문화예술 행사도 차질을 빚으면서 성폭력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피해를 보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못 가린다는 탄식이 절로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제는 고통을 말할 자유도 없구나. 저 앵커와 기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성폭력 피해가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시민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말일까? 아무리 새겨들어도 미투 폭로가 가해자 아닌 애먼 시민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의 출연진 언론인 김어준이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다.

너무나 익숙한 논리. 하지만 너무나 얄팍한 사고방식. 자연스럽게 지난주 소셜미디어 공간을 달궜던 김어준씨의 발언이 떠올랐다.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미투 운동이 정치적 공작에 이용될 가능성이 예상된다”는 말은, 그가 해명한 대로 미투 운동이 훼손될까 염려한 발언이었다 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발언의 논리는 이러했다. 미투 운동이 우리 편을 겨냥하는 데 이용됨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심지어 우리 편을 음해하려는 가짜 폭로도 예상된다, 이 모든 원망이 미투 운동에 돌아갈 수 있으니 운동 자체를 위해서라도 신중해야 한다, 다 미투를 위한 말이다….

조직을 위하여, 너 자신을 위하여, 애먼 사람에게 돌아갈 피해를 생각하여…. 이 논리들은 ‘당신 자신이 다시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라는 배려의 얼굴로 다가온다. 바로 그런 걱정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 대다수가 모진 고통의 기억을 발설하지 못하고 혼자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 무지하다고 할까. 그럼에도 이런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에 우선한다는 사고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리주의라는 사고방식이다. 사회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이 명제는 언뜻 보면 공동체를 위한 자명한 논리처럼 여겨진다. 사회를 하나의 단위로 보고 구성원이 누리는 행복의 총량을 그 사회의 윤리적 지표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행복과 고통이라는 주관적 경험을 동일한 양적 기준으로 계산하기는 어려운 법. 이런 함정 때문에 존 롤스는 ‘차등의 원칙’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구성원의 행복이 아닌 고통을 기준으로 하여, 사회는 고통받는 이에 대한 보상을 우선함으로써 전체의 행복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은 ‘침해의 최소화 원칙’으로 구체화되어 현행법에도 일부 채택되고 있다. 공공 목적을 위한 사유재산 침해를 보상하거나 일조권을 보장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합리적인 해법들조차도 어쩐지 불편하다. 행복은 나눌 수 있지만 고통은 나눌 수가 없고, 당사자의 고통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닌 우리는 기껏해야 위로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에서는 ‘너의 고통을 느낀다’는 말을 성립 불가능한 진술로 본다. 고통의 유일무이한 특징 때문이다. 바늘로 찔린 사람의 고통은 그의 찌푸린 표정으로 짐작할 뿐 내가 느끼는 고통은 아닌 것이다. 행복해하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덩달아 내가 즐거운 행복감에 휩싸이는 것과는 달리 말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유일무이한 고통의 경험이야말로 실존의 증거이고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사실이라 보았다.

미투 폭로의 당사자들이 겪는 고통을 나는 알 수가 없다. 내가 느꼈던 다른 고통에 비추어 짐작하거나 공감할 수는 있지만, 당사자가 느꼈을 유일무이한 고통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집단의 행복으로 개인의 고통을 보상할 수는 없다. 집단의 행복이 개인의 고통을 참아야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또 다른 개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뿐이다.

미투 운동에 따라붙는 이런저런 입방아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전지자 시점이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피해자들을 하나의 사건 내지 사물로 대상화하고 평가한다. 피해자의 말투, 인상, 과거 행적까지 동원하여 허구의 그림을 완성한다. 이 관점은 둘째, 음모론적 시각으로 이어진다. 피해자의 의도와 목적과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따져서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사실처럼 확정한다. 가능성으로 따진다면야 우리는 모두 죽을 가능성의 존재다. 그러기 전에 당장의 현실에 대해 한번이라도 함께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낫지 않은가.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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