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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는 일주일씩의 시차를 두고 찾아왔다. 이주일 전, 갑자기 남편이 복통과 몸살에 시달렸다. 일주일 전 아이가 비슷한 증세를 보이더니,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지난 주말, 마침내 나에게도 오한과 복통이 찾아왔다. 왜 놀아주지 않냐며 성화인 아이로부터 누워 쉴 시간을 쟁취하는 동안 지난 2주간 나의 무심함이 빚어낸 풍경들이 보였다. 아픈 남편이 안쓰러운 한편, 병마로 상실된 남편의 노동력을 내가 메꿔야 하자 슬쩍 짜증이 치밀기도 했던 것, 아픈 아이가 떼쓰자 버럭댄 것. 그 순간이 한없이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아프니까. ‘누워 있는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른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중국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건강한 나라와 병의 나라에 동시에 속한 시민으로서의 이중국적이다”라고 수전 손택은 말했다. 건강한 몸과 아픈 몸이라는 ‘이중국적’을 공유한 경험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간신히 짐작해볼 수 있다. 고작 바이러스성 장염과 감기를 갖고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내가 알 수 없는 질병과 고통들이 도처에 널렸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은 여전히 이해 불가능성의 영역에 머무는 일이 많다.

서울도서관 서울기록문화관에 걸린 세월호 추본 리본. 김창길 기자

별것 아닌 투병기를 어쭙잖게 꺼내든 것은 최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가능한지 묻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다. 지난해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내놓은 데 이어 사회학자 엄기호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펴냈다. 최근엔 미국 작가 레슬리 제이미슨의 <공감 연습>이란 책이 나왔다.

‘고통을 이해하기’에 관한 책들이 쏟아지는 것에 대해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엄기호)는 말이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참사, 미투 운동,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죽음…. 하지만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소화하기 힘든 시대를 관통해왔기 때문이라고.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그러했다. 타인을 집어삼킨 거대한 슬픔을 조롱하고 혐오하기까지 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당한 폭력과 고통에 대해 이해하기보다는 ‘피해자다움’을 평가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건 가능한가? 사실 이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100% 같은 입장과 상황에 처하기는 불가능하며, 100%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의 아픔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을 지레짐작하고 이해하려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레슬리 제이미슨은 “공감하려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낙태, 희귀병을 앓은 경험 등의 고통을 겪은 끝에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한 촉수를 갖게 되었다. 그조차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질문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탐구한 인상적인 작품을 만났다. 황정은은 연작소설집 <디디의 우산>에서 ‘묵자(墨字)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맹인의 문자가 ‘점자(點字)’라면 비맹인의 문자는 ‘묵자’라는 일침. 그것이 너무도 당연해 부를 필요도 없는 게 ‘묵자’의 세계다.

처음 접해 본 ‘묵자’라는 말에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우리가 거대악에 대해 비판하기는 쉽다. 이명박을, 박근혜를, 최순실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재벌 일가의 부 세습을, 갑질을 비판하는 것도 쉽다. 왜냐하면 나는 재벌도 아니고 부패한 권력자도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묵자’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점자’의 세계에 살고 있는 타인의 고통을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만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무지의 영역을 조금씩 줄여나가고, 이해의 영역을 늘려가기 위한 노력, 나 자신을 콩알만큼이라도 확장시키려는 노력 말이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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