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벽(窮僻)한 국가에서 온 일행들은 싱가포르의 작은 섬 ‘센토사’에 여장을 채 풀기도 전 회담이 끝나자 흑기사로 나선 중국이 보내준 전세기를 타고 곧장 돌아갔다. 말레이어로 ‘평화와 고요’를 뜻하는 센토사에서의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은 그렇게 ‘담백하게’ 끝났다. 68년 묵은 적대적 감정은 잠시 뒤로한 채 양쪽 긴 회랑(回廊)을 걸어 나온 두 정상은 서로의 선의(善意)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며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했다. ‘늙다리 미치광이’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젊은 독재자의 결기로 읽혔다. 북·미관계는 아슬아슬한 순간..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온몸으로 뛰고 있는데,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는 지난달 30일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도 있는 핵 재처리 연구 개발을 2020년까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사용후핵연료를 건식 재처리하여 이를 연료로 쓰는 고속로라는 원자로를 연구 개발하겠다는 파이로프로세싱·고속로사업은 1997년부터 20년간 6700억원의 혈세를 낭비했지만 경제성도 안전성도 없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또한 사용후핵연료 건식 재처리를 실제 하려면 한·미 원자력협정상 미국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한데, 원자력계가 사용후핵연료를 재활용하여 연료로 쓰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미국은 핵 확산 가능성이 있는 재처리로 보고 있다. 문 대통령은 파이로프로세싱·고속로사업에 대한 재검토를 공약하였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북부 핵실험장을 5월 중 폐쇄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투명하게 공개하기 위해 한·미 전문가와 언론인을 북에 초청하겠다고 말했다고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29일 밝혔다. 북부 핵실험장은 풍계리 핵실험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풍계리 핵실험장은 2006년 10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6차례 핵실험이 이뤄진 북한 핵무력 개발의 핵심시설이다. 북한은 지난 2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중지하는 한편 핵실험 중지를 투명성 있게 담보하기 위해 공화국 북부 핵실험장을 폐기하는 결정을 채택한 바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못 쓰게 된 것을 폐쇄한다고 하는데 와서 보면 알겠지만 기존 실험 시설보다 더 큰 두 개의 갱도가..
1996년 7월 일본에서 김수용 김일성종합대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나진·선봉 지대 투자유치단의 일원인 그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신사였다. 처음 말을 걸었을 때의 긴장감이 곧 사라진 것도 그런 성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화할수록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종류의 사람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경계심을 완전히 풀어 버린 어느 순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그가 느닷없이 호통을 친 것이다. 그리고 나를 한참 닦아세웠다. 갑작스러운 분노의 격발, 착해 보이는 얼굴에 뚜렷이 새겨진 살기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다음부터는 말을 붙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리선권 북측 대표가 버럭 했다는 소식에 22년 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회담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회담을 ..
유엔 안보리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 발사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북한 외화벌이의 주력 품목인 석탄을 비롯해 철·철광석 등 주요 광물, 수산물의 수출이 전면 금지된다. 북한의 신규 해외 노동자 송출도 차단된다. 북한이 지난달 4일 첫 ICBM급 미사일을 발사한 지 33일 만이다. 제재가 실행될 경우 북한으로서는 연간 10억달러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북한 연간 수출액의 3분의 1 규모라고 한다. 미국이 가장 강력한 제재 중 하나로 추진해왔던 북한으로의 원유 수출 금지는 제외됐지만, 지금껏 국제사회가 취한 대북 조치 가운데 가장 파급력이 크다.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이번 세대의 가장 혹독한 제재이자 북한 정권에 대한 단일 제재로서는 가장 광범위한 경제..
문재인 대통령이 독일 베를린 쾨르버재단 연설을 통해 새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핵과 전쟁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 북한 체제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 추구,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새로운 한반도 신경제지도, 일관성 있는 비정치 남북교류협력사업 추진 등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5대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또 한반도 평화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는 쉬운 일부터 해야 한다며 추석 이산상봉,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군사분계선에서의 적대 행위 상호 중단 등을 제안했다. 남북정상회담도 공식 제안했다. 문재인판 ‘베를린 선언’인 셈이다.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구상은 새 정부의 한반도정책의 큰 방향과 원칙을 밝힌 점에서 무게를 갖는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
북핵 문제는 상당 부분 북·미 간 문제다. 북·미 간 타협과 갈등으로 점철된 북핵 문제의 긴 역사가 잘 말해준다. 그런데도 오바마 정부는 북한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이 쉽게 끝낼 수 있다며 중국에 떠넘겼다. 그런데 그건 미국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미국은 선제타격으로 북한을 무릎 꿇릴 수도 있고, 대북 경제 지원으로 북한 태도를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두 그게 전략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오바마가 북핵 문제를 북·중 간의 문제로 바꿔치기하려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한 이유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은과 트럼프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김정은은 손을 뻗어 트럼프의 옷깃을 ..
임을출 | 경남대 극동문제연 연구교수 북한의 3차 핵실험이 끝난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멘붕’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 중국 등 주변국들 내부에서는 대북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북한은 장거리 로켓에 이어 한층 증강된 핵능력을 과시하면서 핵보유국의 자리에 성큼 다가섰다. 더구나 북한은 미국이 제재 강화 등 적대시정책을 지속할 경우 제2, 제3의 대응조치를 취하겠다고 한 마당이다. 이 때문에 이제껏 해왔던 안이한 임기응변식 조치로는 상황관리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매우 신속하게, 그러면서 보다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그간 ‘전략적 인내’ 운운하며 기존 대북 적대시정책을 유지해온 것에 대해 이제는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