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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벽(窮僻)한 국가에서 온 일행들은 싱가포르의 작은 섬 ‘센토사’에 여장을 채 풀기도 전 회담이 끝나자 흑기사로 나선 중국이 보내준 전세기를 타고 곧장 돌아갔다. 말레이어로 ‘평화와 고요’를 뜻하는 센토사에서의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은 그렇게 ‘담백하게’ 끝났다. 68년 묵은 적대적 감정은 잠시 뒤로한 채 양쪽 긴 회랑(回廊)을 걸어 나온 두 정상은 서로의 선의(善意)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며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했다. ‘늙다리 미치광이’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젊은 독재자의 결기로 읽혔다.

북·미관계는 아슬아슬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언제 그런 일들이 있었나 싶다. 북·미 정상회담은 마치 흑백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북한을 드론 영상으로 보여주려는 듯했다. 셀카를 찍고, 관광객들에게 손을 흔드는 김 위원장을 보면서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일이 더는 없을 듯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전날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정말로 멋진 방문이었다"며 회담 성과를 높이 자평하는 글을 자신의 SNS에 게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서 "정말로 멋진 방문을 마치고 싱가포르에서 귀국하는 길"이라며 "북한 비핵화에 대해 위대한 진전을 이뤘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 억류됐던) 인질들은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의 위대한 영웅의 유해를 가족 품에 돌아가도록 할 것"이라며 "미사일 발사도 없고, (핵·미사일) 연구도 없고, (핵·미사일) 현장은 문을 닫을 것"이라고 강조했다.[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캡처] 연합뉴스

‘강한 힘을 신뢰’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주고받은 언어는 공동성명 이상이었다. 겉으로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그래서 각주(脚註)가 필요한 A4 두 장 분량의 짧은 문서이긴 해도 그것은 보다 복잡한 연관 속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쏟아낸 발언에서 북·미 양국이 앞으로 보여줄 행동 대 행동을 준비하고 있으리라고 능히 짐작되었다. 평양과 워싱턴은 이제 평화와 비핵화 그리고 번영의 구조물을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일까.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새로운 조·미관계 수립을 공동성명 맨 앞에 두었다. 관계 정상화의 시작을 알리는 닻이 올라간 것이다. 당초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해체(CVID)’는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CD)를 향하여 노력할 것을 확약하였다”로 둔갑했다. 합의문에 CVID가 없다는 기자 질문에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CD가 곧 CVID’라고 일갈(一喝)했다. 그러면서 완전한 비핵화가 이루어져야만 제재 완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뒤늦게 복선을 까는 듯이 언급했다.

북한 역시 노동신문을 통해 미국이 진정한 신뢰구축 조처를 취할 경우 상응하게 추가적인 선의의 조처들을 취해 나갈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양국 지도자가 비핵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단계별, 동시행동원칙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대하여 인식을 같이했다는 것이다. 좋게 보면 타협이고, 나쁘게 보면 야합이다.

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한·미 연합훈련을 ‘엄청난 비용이 드는 도발적인 전쟁연습’이라고 규정한 뒤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데 전쟁연습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중단 의사를 밝혔다. 동맹의 지도자가 한·미 군사훈련을 두고 ‘도발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우발적이긴 해도 이런 기조라면 당분간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는 잊고 지내도 될 듯싶다.

그럼에도 무조건 아멘을 외칠 수는 없는 일. 목사의 기도와 설교가 울림으로 다가올 때만 아멘을 외쳐야 하듯, 비핵화의 진정성을 느끼고 상응하는 보상이 실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아멘을 외쳐야 옳다. 그렇다면 주고받을 ‘비핵화 레시피’라는 게 재봉틀로 한 번에 박을 것들이 아니라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야 하는 정치(精緻)한 작업의 결과인 셈이다.

16년 전 6월, 우리는 붉은 전설에 열광했다. 광장으로, 호프집으로 달려가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지금 이 땅에서는 평화의 목소리가 소리 없이 퍼져나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남북이 어떻게 살든 공동 번영하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비핵화는 이미 시작됐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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