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타’(예비타당성조사)입니다. 국가부도 사태를 겪으면서 재정관리의 절실함을 인식한 1999년에 태어났어요. 무분별한 토건사업의 남발을 막고 공공투자사업의 효율성을 담보하려 김대중 정부가 도입한 제도죠. 예타 도입 전에, 정권의 이해와 지역이기가 맞물려 추진된 국책사업이 얼마나 끔찍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는지는 당시 지방공항의 실패가 여실히 보여줬어요. ‘유학성공항’(예천공항), ‘노태우공항’(청주공항), ‘김영삼공항’(양양공항), ‘김중권공항’(울진공항) 등으로 불린 지방공항들은 세금만 축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했어요. 1300억원이 투입된 울진공항은 취항할 항공사가 없어 개항도 못하고 비행훈련센터로 바뀌었어요. AFP가 2007년에 ‘10대 황당 뉴스’로 꼽았으니 말 다했죠. 예타는 비용편익만으로 타당성..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이 9일 2009년 이명박 정부 때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유사시 한국군 자동개입이 포함된 비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털어놨다. 김 전 장관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당시 원전 수주를 위해 MOU를 체결했으며, 그 내용은 “UAE에 군사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한국군이 가기로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전 장관은 “지금 시각에선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그땐 국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중동국가의 전쟁에 자동개입하는 군사협정을 비밀리에 체결해놓고 최선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한다. UAE와의 비밀 MOU 체결은 헌법 위반이다. 헌법 60조는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등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
이명박 정부가 자행한 공작정치의 증거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 규모와 내용이 상상을 초월한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을 동원해 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사찰하고, 공영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임직원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총선에 불법 개입하고, 문화계 블랙리스트 보고를 받은 정황도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과 한마디 없이 “안보가 엄중하고 민생이 어려운 시기에 국익을 해치는 일”이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문재인 정부의 전임 정권 적폐청산 작업은 “퇴행적 시도”라고 규정하고,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의 뻔뻔함에 소름이 돋는다.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가 공개한 문건 중 국정원 작품으로 보이는 ‘야권 지자체장의 국정운영 저해 실태 및 고려사항’ 보고서를 보면 8개 광..
지난주 SBS 에 배우 김규리씨가 출연해 두 눈이 퉁퉁 붓도록 9년 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나에게는 아직 ‘김민선’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그의 지난 삶은 2008년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졸속 협상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 전과 후로 나뉜다. 1044자에 달하는 긴 글이었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비유로 든 ‘청산가리’, 단 네 글자. 이후 9년 동안 그는 “청산가리 먹겠다더니 왜 안 먹었어?” “너 아직도 안 죽었니?”라는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그 때문에 ‘김규리’로 개명까지 했지만 ‘청산가리 여배우’라는 프레임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죽어, 죽어, 하니까 (실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지금도 영화 시리즈 중 가장 좋아하는 (1999)의..
작년 12월23일자 경향신문 ‘시대의 창’ 지면을 통해 나는 ‘19대 대선이 18대 대선과 다른 이유’라는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핵심은 촛불정국을 겪으면서 각 정당 지지층이 모두 대거 이탈해 부동층이 전체 유권자의 절반을 넘게 되었으며, 이번 대선은 누가 그들을 설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대선과는 달리 진영대결이 아니라 국민통합이 화두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오늘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가보려 한다. 흔히 ‘이명박근혜’라고들 말하지만, 박근혜 정부 4년은 이명박 정부 5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주변의 지식인과 정책전문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심각한 종말론적 위기감을 토로했다. 정권의 단물을 나눠 먹고 있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이념도 세대도 상관없는 위기감이었다. 이명..
한국이 국제사회의 동네북이고, 한국외교가 사면초가 상태라는 말은 더 이상 언론의 과장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 저격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래 늘 내치에는 문제가 있어도 외교만은 잘한다는 식으로 평가되어왔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물론 그런 평가는 순방외교의 겉치레에 의한 가짜 이미지였다. 보수정부 9년 동안 철저한 외교무능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외교 입지는 계속 좁아졌다. 부시 행정부의 애완견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 친미를 고집하고,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일본과는 단절했으며, 진보정부 10년간의 남북관계 성과를 폐기함으로써 동북아에서 주도권은커녕 소외돼 버렸다. 이명박 정부의 친미대북강경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변화를 약속하며 집권했던 박근혜 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복잡한 동북아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