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작년 12월23일자 경향신문 ‘시대의 창’ 지면을 통해 나는 ‘19대 대선이 18대 대선과 다른 이유’라는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핵심은 촛불정국을 겪으면서 각 정당 지지층이 모두 대거 이탈해 부동층이 전체 유권자의 절반을 넘게 되었으며, 이번 대선은 누가 그들을 설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대선과는 달리 진영대결이 아니라 국민통합이 화두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오늘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가보려 한다.

흔히 ‘이명박근혜’라고들 말하지만, 박근혜 정부 4년은 이명박 정부 5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주변의 지식인과 정책전문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심각한 종말론적 위기감을 토로했다. 정권의 단물을 나눠 먹고 있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이념도 세대도 상관없는 위기감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그렇지 않았다. 진보와 젊은 세대가 동의하든 안 하든 보수와 기성세대는 나름의 자기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이념이나 세대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이대로 가면 정말로 몇 년 안에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감이 널리 공유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대결적인 정치가 아니라 합의적인 정치가 필요하고, 5년마다 뒤집히는 정책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는 절박한 깨달음이었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도 차기 대선에서 이 깨달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여러 조직과 실험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진보단체와 합리적 보수단체들이 함께 활동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되었다. 아직까지 대중적 공감이란 과제가 남아있었지만, 적어도 지식인·전문가 사회 내부에서만이라도 보기 드문 합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대정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고, 모든 것은 탄핵과 조기대선 국면으로 빨려들어갔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왼쪽에서 세번째)가 지난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 호프집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오른쪽), 이재명 성남시장(왼쪽에서 두번째), 최성 고양시장(왼쪽) 등 경선 경쟁자들과 건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의 경선 라인업은 꽤 괜찮은 그림이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지지율 1위로 우뚝 나서고, 합의의 정치를 앞세워 중도보수까지 확장성을 보여준 안희정이 2위, 문재인의 왼쪽에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준 이재명이 3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문재인의 ‘정권교체, 적폐청산’ 프레임은 앞서 말한 ‘시대정신’에 비추어보면 아쉬움이 많았지만 경선국면이었으므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경선 경쟁력과 본선 경쟁력이 늘 거꾸로 가는 민주당의 딜레마가 있고, 안희정이라는 위협적인 경쟁자가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러나 경선이 끝나고 본선이 시작된 지금도 그 프레임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은 곤란하다. 선거공학적으로 불리할 뿐 아니라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근혜 탄핵과 구속에 대한 변함없이 높은 찬성률이 보여주듯이, 상당수의 보수층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자신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이미 인정했다. 동시에 그들은 박근혜 같은 후보가 아닌, ‘괜찮은 보수’ 후보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왔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정 없다면 문재인에게 표를 주거나 기권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탐색이 반기문에서 황교안과 안희정을 거쳐 안철수에게까지 이어졌다.

안희정의 경선탈락 이후 안철수 지지율이 계속 오르더니 지난 주말 사이 다자구도에서도 안철수가 1위를 차지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적폐세력의 지지를 받는 후보’라는 프레임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적폐 정치인은 버젓이 남아있으나, 적폐 유권자는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지지층의 높은 충성도가 반드시 플러스 요인인지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대선에서도 그들의 높은 충성도는 역으로 확장성을 방해하는 요소를 동시에 가진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최고 권력을 쥐고도 소수파일 수밖에 없는 이 나라의 정치구조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다가 비극을 맞이했다. 안전장치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개도국 대학의 실험실에서 홀로 밤을 새우며 실험에 몰두하다 폭발사고를 당한 과학자처럼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문재인이 철저한 개혁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교훈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개혁과 통합, 개혁과 미래설계를 분리해야 한다. 개혁은, 설사 저강도라 하더라도, 법과 시스템에 따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5년 내내 지속되어야 한다. 저강도의 일관된 개혁이 고강도의 일회성 개혁과 그에 따르는 역풍에 비해 훨씬 효과적이다. 후보는 ‘청산’을 말할 것이 아니라 ‘통합’과 ‘미래’를 말해야 한다. 19대 대선의 화두는 진영 대결이 아니라 국민통합이다. 상대 진영은 이미 파산했고, 안철수 지지자는 청산 대상이 아니다. 19대 대선은 18대 대선과 다르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