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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타’(예비타당성조사)입니다. 국가부도 사태를 겪으면서 재정관리의 절실함을 인식한 1999년에 태어났어요. 무분별한 토건사업의 남발을 막고 공공투자사업의 효율성을 담보하려 김대중 정부가 도입한 제도죠. 예타 도입 전에, 정권의 이해와 지역이기가 맞물려 추진된 국책사업이 얼마나 끔찍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는지는 당시 지방공항의 실패가 여실히 보여줬어요. ‘유학성공항’(예천공항), ‘노태우공항’(청주공항), ‘김영삼공항’(양양공항), ‘김중권공항’(울진공항) 등으로 불린 지방공항들은 세금만 축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했어요. 1300억원이 투입된 울진공항은 취항할 항공사가 없어 개항도 못하고 비행훈련센터로 바뀌었어요. AFP가 2007년에 ‘10대 황당 뉴스’로 꼽았으니 말 다했죠.

예타는 비용편익만으로 타당성을 결정하지 않아요. 경제성, 정책성, 지역균형발전 지수를 종합해 판단해요. 이명박 정부에서 예타를 패싱하는 편법이 난무했지만, 1999년 도입 이후 2016년까지 782개(333조3000억원) 대형 사업 중 273건(136조9000억원)에 대해 부적합 판정을 내렸어요. 마구잡이 토건사업을 막는 ‘문지기’ 역할을 한 것이죠.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1월28일 (출처:경향신문DB)

세계적인 재정관리 우수 제도로 평가받던 예타에게 시련이 닥쳤어요. ‘토건 대통령’이 등장하면서요. 이명박 정부는 2009년 3월 국가재정법 시행령을 개정해 예타를 거치지 않고 추진할 수 있는 사업 항목을 5개에서 10개로 늘려버렸어요. 토건국가로 질주할 고속도로를 뚫은 셈이죠. 이를 앞세워 밀어붙인 게 4대강 사업이었어요. 그뿐이겠어요. 광역별 30대 선도 프로젝트 중 21개 사업을 ‘예타 없이’ 추진했어요. 이명박 정부 5년(2008~2012년) 동안 ‘예타 면제’ 토건사업은 68개, 총사업비는 54조원에 달해요. 노무현 정부에 비해 최소 8배 이상 많은 규모예요.

차마 이럴 줄 몰랐어요. ‘토건 대통령’ 때의 삽질을 문재인 정부에서 겪게 될 줄 짐작이나 했겠어요. 이명박 정부의 광역별 30대 선도 프로젝트 이후 10년 만에 예타를 따돌리고 대규모 토건사업들을 밀어붙인다잖아요. 김경수 경남지사의 1호 공약인 남북내륙철도의 예타 면제를 대통령이 약속하더니, 이내 시·도별로 한 건씩 ‘예타 면제’ 사업을 나눠줄 판이에요. 남부내륙철도는 사업비(5조3000억원)가 올해 철도 전체 예산과 맞먹는 대형 SOC예요. 이걸 예타 면제로 풀어주는 상황이니, 다른 시·도들도 무조건 ‘최대 예산’의 토건사업을 들고 나선 것이죠. 이미 예타에서 탈락한 토건사업들이 수두룩해요. 개발과 토건에는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이 자유한국당 뺨치는 것 같아요. 남부내륙철도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공약이기도 했어요. 박근혜 정부도 추진하려 했으나 예타에서 탈락해 어쩌지 못했는데, 문재인 정부에서 살아났어요. “박근혜도 MB식 토건사업은 안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이상돈 바른미래당 의원)는 비판이 나올 밖에요.

모욕적으로 들리겠지만 이런 토건 잔치는 ‘MB 따라하기’ 같아요. 정치적 판단에 따라 ‘예타 면제’ 사업을 광역별로 나눠주는 거나, 대규모 토건으로 단기적 경기 부양을 도모하는 땜질식 처방 모두 ‘MB식’이잖아요. “적폐로 비판해온 이명박 정부를 답습하는 꼴”(경실련 성명)이란 소리를 들어도 싸요. 아무리 지역균형발전이라 포장해도 ‘삽질’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토건에서 나쁘고 좋고의 유전자가 따로 있나요. 이명박도 4대강 사업과 그 많은 토건사업을 ‘예타 면제’로 추진하면서 매번 ‘지역균형발전’을 내세웠어요.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이런 진단을 한 적이 있어요.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살린다고 26조~27조원 정도를 쏟아부었다. 그 바람에 다른 산업에 투여할 수 있는 재정투자가 굉장히 약해졌다. 그 돈을 아마 4차 산업혁명 쪽으로 그 당시에 돌렸으면 지금쯤은 기술 개발이라든가, 인력 양성이 많이 돼서 산업의 경쟁력이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이번에 시·도별로 1건씩 ‘예타 면제’ 사업을 선정하면 총사업비는 4대강 사업에 버금갈 거예요. 이 대표의 진단이 여권에 ‘칼’이 되는 게 아닐까요.

이제 예타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됐으니, 꼭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박근혜 정부 때 검토되다 흐지부지된 ‘최고정책당국자 실명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죠. 정부나 지자체가 시행한 국책사업이 추후 실패한 사업으로 판명날 경우 최고결정자에게 법적 책임까지 물을 수 있게 하는 제도죠. 이번부터 ‘김경수 철도’ ‘송하진(전북지사) 공항’ ‘이철우(경북지사) 고속도로’의 최고책임자들을 분명히 해 두자고요. 이게 유명무실해지는 ‘예타’를 대신해 지역이기주의와 포퓰리즘으로 추진되는 망국적 토건사업을 막는 방패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글에서 화자는 예비타당성조사를 의인화해서 설정한 것입니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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