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자 저것은 침대처럼 무겁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결정하자 저것은 망가진 침대 저것이 망가진 것뿐인데 나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침대를 옮기고 있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내 몸 위로 침대가 버려진다 내 몸에 이렇게 방이 많았나 방마다 망가진 침대가 들어앉는다 이렇게 좁은 입구를 뚫고 어떻게 네가 들어온 거니? 나는 어쩌자고 침대를 낳을 생각을 한 거니? 좁아터진 방마다 침대가 만삭이다 일요일에 해치울까? 엘리베이터는 아직 수리 중이다 신호등 앞에서만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은 줄곧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다 폭신한 구름다리를 들고 서 있는 골짜기들처럼 나는 무거워졌다 - 조말선(1965~ )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침대는 안방을 차지..
1 가만히 들여다보라 아직 그 속에 갇힌 천둥소리 물소리 들리지 않는가 백만년 전 그 뜨거운 대지 속을 날아가던 잠자리의 날갯짓, 또 그 속을 흐르던 피들의 숨 가쁜 일어섬까지. 2 발가락을 모으고 푸른 강물 흐르는 열 손가락을 모으고 온몸이 귀가 되거나 착한 눈빛이 되어 세상 죄 없는 것들의 이름과 아직 말이 되지 않아 또 죄 없는 것들의 이름을 하늘 가득 떠올렸다. 3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바위 하나 내 살 속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숨 쉬지 않고 풀어놓은 숨이 먼지 같은 내 생을 자꾸만 둥글게 잡아당겼습니다. - 이승희(1965~ ) 집에서 멀지 않은 오동근린공원에는 유난히 바위가 많다. 흔하디흔한 화강암과 꽃들이 서로 성질이 다른데도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한 뿌리에서 나온 것 같다. 꽃이 피면 바..
트럭에서 내렸다 나쁜 냄새 부품마다 나쁜 생각을 했나보다 꽃나무 옆에 한참 서 있었는데 꽃나무 밑동에서도 휘발유 냄새가 났다 시계를 보지 않는 이슬과 바람에게서도 시간을 보지 않는 시계에서도 끊임없이 겁나던 두려움에게서도 앞이 보이지 않던 눈물에게서도 먼 길을 함부로 달려온 트럭 냄새가 났다 꽃냄새가 되려고 국화가 되었다가 작약처럼 붉기도 했지만 나쁜 냄새는 휘발되지 않아 내 나쁜 생각 위에 뚫린 창문들을 자꾸 열어 - 최문자(1943~ ) 좋지 않은 생각을 하면 꽃에서도 휘발유 냄새가 나는구나. 나쁜 생각은 해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니 그 기운이 꽃향기조차 역하게 바꾸어 놓는구나. 갑자기 누군가가 몹시 싫어진다면, 늘 듣던 말이나 별것 아닌 행동이 오늘따라 몹시 거슬린다면, 늘 맛있게 먹던 단골집의 음식 ..
기지개와 혀가 튀어나오고 긴 꼬리가 스멀거리고 까맣게 부릅뜬 눈동자가 굴러 나와 알을 낳고 올챙이와 민들레로 피어나고 뱀으로 자라나고 수많은 꽃잎으로 퐁퐁퐁 터지는 구멍 강아지가 킁킁거리며 파헤칠 때 포르릉 뛰며 달아나는 아지랑이와 나비 목구멍이 간지러운 구멍 벌컥벌컥 달빛을 받아 마시는 구멍 빛이 먹고 싶었던 구멍 홀로 어두웠던 구멍 텃밭 가득 온몸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던 구멍 더 깊은 지하를 깨우는 구멍 혀뿌리까지 깨어난 구멍은 아주 오랫동안 잠들지 못할 것입니다 - 장인수(1968~ ) 봄에는 허파에서 밀어 올리는 숨이 힘차서 콧구멍까지도 넓어지는 것 같다. 그 숨을 감당하느라 심장도 빨라지는 것 같다. 관절은 왜 운동을 하지 않느냐며 우두둑 소리를 낸다. 땀이 나오려고 자꾸 피부를 간질인다. ..
오전 열한 시에 나는 소리들을 흡수하였다. 오전 열한 시에 나는 가능한 한 시끄러웠다. 창문을 열고 수많은 목소리가 되었다. 나는 음속으로 변형되었다. 네 안에 들어가서 삼십 초 동안의 기억이 되었다. 비 내리는 어머니의 썩어 가는 몸을 흘러갔다. 나는 소문이 흩어지는 무한한 형태가 되었다. 침묵하는 허무주의자들을 혐오하였다. 육식동물의 더러운 식욕이 되었다. 혈관 속을 지나가는 피와 피의 현란한 각도, 아이들이 자라는 소리, 우유가 상해가는 소리, 나는 무성영화 속의 주인공이 가장 크게 벌린 입이 되었다. 오전 열한 시에 귀를 막았다. 오전 열한 시에 눈을 닫았다. 나는 완벽하게 침묵하였다. - 이장욱(1968~ ) 백색 소음. 늘 들리지만 들리는지 모르는 소음. 안 들리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고막을 ..
운악산 현등사 보광전 기둥에 걸어놓은 목탁에 새가 깃들여 산다 목탁의 구멍으로 드나드는 곤줄박이 한 쌍의 비상이 경쾌하고 날렵하다 곤줄박이는 알 품고 새끼 기를 집이 맘에 들어 기꺼이 노래하고 새의 노래 듣는 스님은 새 날아간 자취 더듬듯 목탁에 손때 먹인 세월 되새긴다. - 최두석(1955~ ) 현등사 스님은 슬기롭기도 하지, 두드리는 스님이 없어도 스스로 맑은 소리를 내는 목탁을 절 기둥에 매달아 놓을 줄을 알았으니. 스님의 마음 씀씀이는 놀랍기도 하지, 목탁을 예불이나 염불 도구로만 쓰는 게 아니라 생명이 깃드는 집으로도 쓰고 있으니. 곤줄박이는 참으로 용하기도 하지, 제 울음을 허공에 떠도는 뭇 생명들의 영혼을 부르는 소리로 변화시키고 있으니. 법당에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선창하면 절 ..
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가 뭍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고, 그는 한 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며 시간을 잊는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다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먼 바다로 나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 허연(1966~ ) 북극곰은 어떻게 인내하는 법, 동물적인 욕망과 야생적인 본능을 다스리는 지혜, 겸손하게 기..
- 3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나는 여태 구두끈을 제대로 묶을 줄 모른다 나비처럼 고리가 있고 잡아당기면 스르르 풀어지는 매듭처럼 순수한 세상이 어디 있을까 내 매듭은 잡아당겨도 풀리지 않는다 끊어질지언정 풀리지 않는 옹이들이 걸음을 지탱해왔던 것이다 오늘은 현관을 나서는데 구두끈이 풀렸다며 아들이 무릎을 꿇고 묶어주었다 제 엄마에게 배운 아들의 매듭은 예쁘고 편했다 일찍 들어오세요 버스 정류장까지 나비가 따라왔다 - 전윤호(1964~ ) 시인은 늘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도, 왜 넥타이를 매거나 선물을 포장하듯 예쁘게 구두끈을 묶을 줄 모를까. 무엇에든 구속되고 고정되는 것을 싫어하는 심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구두끈을 맨다는 것은 일하러 출근한다는 것, 맨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