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들이 점점 커진다 샌들은 나무, 내 발은 나뭇잎, 큰 신이 벗겨지지 않는다 나는 두 그루의 나무를 신고 있다 바람이 좌판 빨강색 귀걸이를 만질 때 왼발이 꺼진 핸드폰 속 숫자를 누른다 햇살이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머리를 잡아당길 때 오른발이 칼 박물관의 칼의 ㄹ을 지우고 있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길이 흔들린다 나를 신고 가지를 뻗어가는 두 장의 지도 나뭇잎이 지도를 벗어나 휘날린다 나도 모르게 나의 발을 자른 걸까 벗지 못하는 DNA와 신지 못하는 DNA 오른발이 홈쇼핑의 글루코사민 광고를 보고 왼발이 아일랜드에 풍차를 세운다 나뭇잎아, 오래오래 아주 오래 공중에서 머물러라 오줌을 싼 이부자리 지도가 지워지기를 기다리던 그 시간처럼 샌들이 커진다 점점 커진다 - 박도희(1964~) 발가락이 다..
어둠이 내릴 때 나는 저 커브 길을 펼 수도 구부릴 수도 있었지 저 커브 길 끝에 당신을 담을 수도 있었지 커브 길을 들어 올릴 수도 낭떠러지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지 당신이 내게 오는 길이 저 커브 길밖에 없었을 때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했지 커브 길 밖에서는 언제나 푸른 자전거 벨이 울렸지 - 이윤학(1965~) 기다림이 길을 만든다. 기다림이 푸른 자전거 벨소리를 듣는다. 기다리다 지치면 길을 폈다가 구부리기도 하고 몇 번이나 길 끝에 그리운 사람을 담아보기도 한다. 기다리다 심통 나면 길을 들어 올렸다가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기다림은 고통스러운 희망에서 온다. 보고 싶은 사람, 간절히 바라는 삶이 끝내 오지 않아도 금방 나타날 것만 같아서 기다림을 그칠 수 없다. 길 끝에 고정된 눈을 거둘..
나는 저 작디작은 손들을 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곤 한다 은행과 보험사와 증권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골목의 구멍가게를 지나칠 때 지친 나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나는 집으로 품고 가기 위해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알은체까지 하며 봉지에 적당히 담는 것이다 저것들이 눈을 활짝 열어주는 별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지만 기쁜 그림엽서쯤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 내 그림자를 키우지는 못하겠지만 정치 뉴스처럼 짜증스러운 하루를 보듬어주는 우리 집 현관문쯤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저것들의 눈빛이 있는 한 나는 꽤 깊은 밤까지 한그루의 나무를 심듯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것이다 꽝꽝 언 이 겨울 같은 세상살이에서 주택부금을 들 때와 같은 기대감을 품고 가장의 체면도 지킬 것이다 - 맹문재(1963~ ) 바라보는..
(…) 그 후 나의 두 눈을 향해 길이 자라났어요. 나는 그 길을 더 이상 알지 못해요. 이제는 모든 것이 나의 내면에서 아무 걱정 없이, 확실한 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어요. 병이 나아가는 사람처럼 감정들은 걷기를 즐기면서 나의 몸의 어두운 집을 이리저리 걷고 있어요. (…) 나의 이마는 보고, 나의 손은 남의 손에 들린 시들을 읽었지요. 나의 발은 발길에 와닿는 돌들과 이야기하고, 새들은 일상의 벽에서 나의 목소리를 가져가지요. 나는 이제 그렇게 아쉬운 게 없어요. 모든 색깔들은 소리와 냄새로 옮겨지니까요. 색깔들은 음향으로 한없이 아름답게 울립니다. 책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요?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요. 나는 거기에 무슨 말이 적혀있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가끔씩 그것을 살며시 ..
아침에 싸는 똥은 어젯밤의 내 내력이다 그러니까 몸뚱이의 무늬다 무얼 먹었는지 무슨 말을 가졌는지 싸웠는지 하하 즐거웠는지 남김없이 보여준다 사랑과 폐허, 그리고 원망과 주저 등을 몸은 끙, 한마디로 말한다 쌓아두지 않는 게 몸의 운명인데 내가 지금껏 한 고백들, 선언들, 다짐들은 모두 무언가에 짓눌려 뱉어진 것이다 그리고 내 업이 되어버렸다 지금껏 그걸 모르고 살았는데 오늘 아침에도 똥은 아무 형식도 없이 쏟아진다 어젯밤에 술 취해 고성을 질렀던 핏대도 아프게 쏟아진다 귀 기울여보면 대체 무엇이 이보다 더 냄새나는 말인가 이 세상에 햇빛이 가닿은 우주 안에 - 황규관(1968~) 오늘 배 속은 안녕하신가요? 아침마다 변기에서 똥이 인사를 건넨다. 매일 다른 색 바른 냄새로 다른 인사를 한다. 어제 먹은..
토요일의 햇살은 반쯤 누워오는 것 같다 반공일처럼 반쯤 놀다 오는 것 같다 종달새한테도 반쯤 울어라 헤살 부리는 것 같다 반쯤 오다 머문 데 나는 거기부터 햇살을 지고 나르자 반쯤은 내가 채우러 갈 토요일 오후의 외출. - 고운기(1961~) 토요일이 반공일이던 때가 있었다. 오전만 일해도 얼마나 여유가 있었던가. 빡빡한 일상, 정신없는 날들이지만, 토요일은 일도 반만 하고 공부도 반만 하고 생각도 반만 하고 고민도 반만 해도 되는 날이었다. 출근 복장도 반이면 되니까 넥타이 풀고 티셔츠에 운동화면 된다. 토요일 오전 시간은 오후에 대한 기대로 헐렁헐렁해진다. 초침과 초침 사이는 넓어지고 그 사이는 무엇을 할까 쓸모없어도 자유로운 생각들로 가득 찬다. 인생은 한없이 긴 것 같고, 세상은 넓은 것 같고, ..
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서도 그보다 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 - 박성우(1971~ ) 이렇게 귀여운 촌스러움이라면 좀 떳떳하게 촌스러워도 되지 않을까. 두메산골 고향은 그리워도 왜 촌스러운 것은 부끄러울까. 한국인인 건 자랑스러워도 왜 촌스러운 건 숨기고 싶을까. 왜 세련되지 못해서 안달했을까. 패션도 디자인도 유행도 성형도 촌스러움을 잘 가릴수록 비싸다...
이급 시각장애 아버지 이온업(48) 씨가 일급 정신지체장애 아들 이기독(20) 군의 허리를 끈으로 동여매고 걷는다 넘어질 때면 무거운 머리부터 넘어지곤 하는 아들을 너펄너펄 걷게 하는 건 등뒤에서 아버지가 붙잡고 걷는 끈이다 새벽 우유배달하는 아버지는 새벽이라서 어둡고 지하방에 누워 있는 아들을 씻기고 먹이는 아버지는 지하라서 어둡지만 담벼락 밑 낮은 패랭이는 알고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이 끈에 묶여 걷는 까닭 아들이 툭툭 패랭이꽃을 더욱 멍들게 하는 까닭 아버지 신발 뒤축이 담벼락 쪽으로 닳아가는 까닭 걷는 게 온통 업(業)이고 걷는 게 기독(基督)이라는 걸 뱃속을 나와서도 끊지 못하는 질긴 탯줄이라는 걸 업이 기독을 앞세우고 걷는다 넘어진 꽃이 눈먼 뿌리를 뒤세우고 걷는다 - 정끝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