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가족의 건강과 복지 증진을 위해 웃음 쿠폰을 발급했어요. 울적하거나 울먹할 때 가까운 인출기에서 뽑아 사용하면 되죠. 하지만 수산물 센터 김씨는 오징어 회 한 접시에 자신의 쿠폰을 끼워 팔았어요. 대형 할인점에 우유를 납품하는 박씨도 자신의 쿠폰을 사용해 왔고요. 부도덕한 상술이라고 비난한 사람들도 있지만, 불법이랄 게 있나요. 뭐랄까, 그렇게밖에는 쿠폰을 쓸 수 없었나 보죠. 덕분에 여분의 웃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서, 밤새도록 웃을 수 있는 도시의 경계도 생겨났어요. 누구는 경계가 아니라 전선이라 말하지만, 그저 우리는 더 많이 웃을 수밖에요. 그래서 우르르 필드로 몰려 나가 에스까르고를 까며 꺄르르 웃었어요. 까르페디엠! 가끔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하죠. “너, 그 웃음 ..
책을 책꽂이에 꽂는 일이 먼저이고요, 책꽂이의 책을 가지런히 하는 게 그 다음입니다. 책꽂이가 좁아 책을 책상 모서리에 쌓아올려야 하고요. 연필을 깎다 보니 손이 더러워졌죠. 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촛불을 밝히는 일이 먼저이고요, 흘러내리는 촛농이 굳기를 기다리는 일이 그 다음입니다. 촛불이 만들어주는 그림자에 흰 종이를 내어 보여주지요. 그림자가 잠드는 때를 기다립니다. 손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책상 서랍을 열어 잡동사니를 정돈합니다. 필통, 수첩, 만년필, 저금통장, 동전, 묵은 교통카드, 영수증, 알약, 사진 여러 장……. 사진을 보다가 눈이 움푹 들어가 버렸네요. 움푹 팬 눈이 우물이 되었고요. 그 우물 속으로 누가 두레박을 타고 내려옵니다. 오디오를 켜는 일이 먼저이고요, 음..
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 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공원에 들어선다 우는 아이의 입엔 뼈가 물려 있다 1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언덕을 오른다 노파의 몸을 박차고 나온 뼈들이 경쾌한 음을 내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노파의 발걸음이 거벼워진다 유모차가 가벼워졌기 때문이라고 노파는 생각한다 3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상점 거리를 걷는다 쇼윈도우에 노파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목 없는 마네킹 위로 노파의 얼굴이 붙었다 떨어지고 붙었다 떨어진다 그 시간 악기점 주인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손가락은 몸의 구멍을 막느라고 분주하다 4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집을 나선다 이곳엔 마땅히 벽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방이 벽이다 45분 전, 테이블 위에는 자궁처럼..
탁자는 다리가 넷 나는 다리가 둘 나는 걷고 탁자는 걷지 않고 새는 다리가 둘이다 새는 날아다니고 너는 다리가 둘 탁자는 다리가 넷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 거야 아니면 없을 거야 다리가 넷 달린 개 한 마리가 총총총 앞을 지나고 이 모든 일을 알고도 탁자는 가만히 있다 - 황인찬(1988~ )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물음이 있다. 왜 나는 다리가 둘이고 탁자는 넷인가.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는 궁금증이 있다. 왜 나는 걷고 탁자는 걷지 않을까. 나는 왜 이것이 궁금하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정말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궁금증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먹고사는 일을 궁리하거나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기에도 바빠서 궁금해질 틈이 없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궁금증은 다 쓸모없는 ..
구로동 그늘 언덕 가장 유순한 흙부터 녹기 시작하고 쓱쓱 손바닥을 비비면 엄지 끄트머리 갈라졌던 굳은살도 보들해진다 감감무소식 너의 곁에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던 내 곁으로 새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천천히 흐르고 돌아온다 무거웠던 왼발, 오른발, 걸었더니 아침 골목길이 움직인다 가방 멘 아이들이 지나가고 일터로 가는 사람은 첫 담배에 불을 당긴다 하루에 하나씩 손가락을 모두 활짝 펼치고 나면 열릴 것이다 3월의 맨 윗단추가 - 배성희(1959~) 아니 벌써! 정유년 새해도 두 번째 달이다. 먹고사는 일과 걱정거리에 끌려다니는 사이에, 소설보다 재미있고 드라마보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뉴스에 정신 팔려 있는 사이에, 슬쩍 1월 지나고 2월이라니! 영하 10도 밑을 후벼 파는 맹추위와 눈보라가 한창인데,..
아무것도 숨길 필요 없는 가까운 벗 나의 온갖 부끄러움 속속들이 아는 친구 또 한 명이 떠나갔다 그렇다면 나의 부끄러움 그만큼 가려지고 가려진 만큼 줄어들었나 아니다 이제는 그가 알고 있던 몫까지 나 혼자 간직하게 되었다 내 몫의 부끄러움만 오히려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기억의 핏줄 속을 흐르며 눈감아도 망막에 떠오르는 침묵해도 귓속에 들려오는 그리고 지워버릴 수 없는 부끄러움이 속으로 쌓여 나이테를 늘리며 하루 또 하루 나를 살아가게 하는가 - 김광규(1941~ ) 나이 들수록 남에게 잘못한 것, 내 양심에 거스른 것, 후회할 일들은 점점 커지는 거구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나를 누르고 숨통을 조이는 거구나. 남에게 다 털어놓아서, 손찌검 받아서, 반성하고 후회해서 내게서 떠나보낸 것들이야 점점..
바람의 이랑에 씨 뿌려 가꾸는 나는 구름작목반 농부 호박 같은 구름 한 덩이 꿈 밖으로 궁굴려 나오는 궁리 중이다 눈 쌓인 논배미 아래 낮은 언덕길을 빵모자를 쓴 사람이 걸어간다 머리만 보인다 보는 사람 없는 이 틈에 공이나 굴려볼까 제 머리를 공 굴리듯 굴리고 간다 털실뭉치가 언덕을 굴러가는데 눈 하나 묻지 않는다 저 이는 햇빛과 바람과 하늘의 물꼬를 터 공중에 빚어 거는 호박작목반 농부다 누가 이 엄동에 추수를 하나 실한 알곡들 또다시 함박눈 내린다 - 이선식(1954~ ) 하늘에 밭을 갈고 물알갱이를 심어 구름을 가꾸고 탐스러운 눈을 수확하는 ‘구름작목반 농부’를 상상해 본다. 시인은 비행기 창 너머로 광활하고 풍성한 구름밭을 보면서 게을러도 수확은 늘 풍성한 이 구름 농사 사업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욕실 거울에 물을 뿌리기에 뭐하는 거니 역정을 냈더니 엄마 이거 보세요 물방울들의 경주 거울 벽을 타고 뛰어내리는 물방울들을 얘가 1등 쟤가 2등 아이가 등수를 매기는 동안 나는 벌써 거울의 맨 아래 도달해 부서져버린 고인 물을 보아버렸다 나도 왕년엔 러브 스토리를 일곱 번 읽고 여덟 번 목 놓아 울 정도로 수많은 물방울들을 해방시켜왔는데 오늘 너의 시선은 거울에 달라붙은 맑고 또렷한 물방울이고 나의 시선은 이미 깊은 곳으로 스며들며 새로운 경주를 시작하는 오래된 물방울이지만 물방울들의 경주에 눈을 떼지 못한 채 거울 앞에 서 있는 지금 너와 나 새삼 닮아서 닿아 있는 물방울 둘이다 - 성미정(1967~) 비 온 후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속 풍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