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친절이 과하면 병이 된다. 문제의 근본을 바라보고, 고치기보다 현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속칭 게임 셧다운제라 불리는 제도가 있다. 개정된 청소년보호법에 포함되어, 2012년 1월부터 계도기간을 거쳐 시행되고 있다. 게임 셧다운이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밤 12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만 16세 미만 청소년들의 인터넷 게임 접속을 차단하는 법이다. 첫 이슈는 ‘청소년의 수면권 확보’라는 친절하고 다정한 이름으로 추진됐다. 내일의 꿈나무인 청소년들이 밤에 잠을 제대로 자야 하는데 게임을 하느라 잠을 못 잔다. 이 때문에 청소년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게임 접속을 못하게 하자는 취지다. 내 유년시절에 라디오와 TV에서 밤 10시가 되면 어..
정지은 | 문화평론가 오늘은 화요일, 집 앞에 순대 트럭이 오는 날이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이 순대 트럭은 맛있는 순대와 친절한 아줌마 덕에 제법 손님이 많다. 몇 번 사먹었더니 아줌마는 간을 좋아하는 내 취향을 기억하고 있다가 간을 듬뿍 넣어주곤 한다. 아줌마의 사소한 친절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순대를 썰다가 크게 쓱싹 썰어서 “아, 해봐” 하며 내 입에 쏙 넣어주는 순대 한 조각이 그것이다. 어차피 집에 가져가서 먹을 순대지만, 발 동동거리며 기다리는 동안 입에 넣어주는 순대는 유난히 맛있고 따뜻하다. 김장날 엄마가 고무장갑 낀 손으로 즉석에서 돌돌 말아주던 배추쌈 같기도 하고 소풍날 아침 집어먹던 김밥 꼬투리 맛 같기도 하다. 순대를 고르고 썰고 포장하고 돈을 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줌마와 ..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2002년 12월이었어요. TV에 나온 권영길 대통령 후보가 어눌한 목소리로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덜컥 안부를 물었을 때 먹먹한 울림이 일었던 기억, 혹시 있으신가요? 개그맨들의 유행어가 되어 아이들도 따라 했던 이 인사말은 그러나 한 해 전인 2001년 12월에 첫 방송을 탄 BC카드의 광고 인사말과 싸우기엔 역부족이었지요. 스타 연예인 김정은씨가 달콤하게 외쳤던 “여러분 부자 되세요!”는 안녕을 묻거나 끼니를 챙겨주거나 복 받으라며 건넸던 우리의 소박한 덕담을 싹 집어삼킨 ‘국민 메아리’가 되어 오늘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될 것 같은, 아니 네가 어떻게 되든 나는 꼭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 고독한 다수의 자기계발 주기도문들...
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올해처럼 다양한 사극이 쏟아져 나온 해도 드물다. 선거의 시기가 돌아올 때면 권력 다툼을 중심으로 하는 사극을 통해 정치적 열기가 표현되곤 했으니 유별난 현상은 아니다. 그런데 올해의 사극 열풍은 일견 예년의 정치사극 붐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 것도 같다. 상반기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판타지 사극 ,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과 , 멜로와 호러와 코미디와 활극을 뒤섞은 등 다양한 하위장르적 재미를 내세운 퓨전사극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들 역시 다양한 장르적 외피 아래 은근한 정치적 화두를 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는 남녀 주인공의 운명적 로맨스를 그린 사극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 개혁을 꿈꾸는 지도자들의 이야기이..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이렇게 해서 화나고, 저렇게 해서 화가 난다. 때론 참고, 때론 못 참는다. 대개 큰 화는 참고, 작은 화는 못 참는다. 작은 화가 차곡차곡 모여 거대한 신경증 사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무관심하다가 전혀 화를 내지 않아야 될 타이밍에 폭발한다. 예를 들어 아이유 사진 같은 경우에 말이다. 타블로 사건에서 얄팍한 교훈도 얻지 못한 듯하다. 그녀가 국민 여동생이건 꽃의 천사이건 간에 사생활은 사생활이다. 사진에서 나오지 않는 부분도 창의적으로 재해석한다. 나중에 아이유도 나올라. 작은 화들이 거대하게 모여 신경증 사회가 되어버리자 선사에서 참선하던 스님들은 제각각 화를 못 참는 중생들을 위로한다. 참 고마운 일이지만 때론 답답하기도 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도 거의..
정지은 | 문화평론가 solbitur@gmail.com 위험하고 불편하고 지저분하다. 비싼데 환불이나 교환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앞으로 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울며 겨자먹기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품이 있다. 이 마법(?) 같은 상품의 이름은 바로 경인고속도로다. 만일 당신이 처음 이 상품을 이용하게 된다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화물차가 있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 각종 트레일러와 탱크로리, ‘낙곡 방지’를 커다랗게 써 붙인 곡류 운반차량, ‘차이나 시핑(china shipping)’류의 컨테이너, 원목이 가득 실린 차도 자주 보인다. 한 연구기관이 내놓은 ‘인천항 화물자동차 통행특성 분석’에 따르면 인천항을 통행하는 화물차는 1일 평균 3000대, 이 차들 대부분이 경인고..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돌아보니 성북문화재단의 출범은 참 고즈넉했네요. 개소식도, 초대장도, 누리집도 미뤄 둔 첫날이었지요. 10월 중순에 치른 성북진경 축제를 빼면 그때나 지금이나 재단 직원들의 나날은 성북 ‘학’(knowledge)을 찾아 배우는 일과로 채워지고 있거든요. 성북의 경제학과 사회학을 익히면서 이 앎을 어느 곳 누구하고도 교류하며 상생할 수 있는 인류학으로 발견하고 호명하는 과정이 성북 ‘학’이라는 지역학의 쓰임새임을 새삼 느끼면서요. 같은 이치로 성북문화재단 ‘학’도 만드는 중이지요. 성북에 사는 사람과 성북을 찾는 사람을 더불어 흥하게 하는 문화학과 조직학을 묻고 찾는 것이 성북문화재단 ‘학’이다 하면서요. ‘학’이라고 썼지만 발품 팔고 진땀 흘리며 이곳의 역사와 생활사 현장들을..
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herland@naver.com 아줌마가 돌아왔다. 올해 TV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 활약을 펼친 인물군은 단연 아줌마다. ‘시월드’와의 인위적 가족관계에 의문을 제기한 며느리 차윤희(), ‘아내의 자격’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그 이전에 ‘여자이자 인간’임을 선언하는 윤서래(), 가사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한 고봉실()까지. 이들은 며느리, 아내, 엄마라는 역할에 한정되며,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뭉뚱그려진 기혼여성들의 익명성과 타자성에 맞서 부단한 실명의 전투를 벌인 올해의 캐릭터들이다. 여기에 최근 ‘대한민국 아줌마’의 대변자를 자처하며 전업주부의 고충을 고하는 또 한 여성이 가세했다. KBS 월화드라마 의 나여옥(김정은)이 그 주인공이다. 는 여옥이 가부장적 남편,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