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창작 우리는 지금 상상력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다양한 상상력은 새로운 시대의 경쟁력이라 칭송받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희한하게 창의력과는 상관없는 방향의 상상력만 끓어 넘친다. 가장 많은 이들을 사로잡는 과잉 상상력은 연예인에 대한 뒷소문이다. 신문기사에서는 이니셜로 연예인의 사생활을 기사화하고, 게시판이나 e메일, 최근에는 SNS를 통해 차수를 바꾼 엑스파일이 돌아다닌다. 그나마 이런 상상력은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디에나 있는 가십거리라고 치자. 그런데 정말 곤란한 건 국가기관의 과잉 상상력이다. 애초에 747이라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집권에 성공한 MB 정부의 스펙터클 판타지 상상력은 를 연출한 김재환 감독의 으로 정산하고, 난 음란마귀에 사로잡힌 이들에 대해 이야..
정지은 | 문화평론가 고백하자면 내 펀드 투자의 역사는 꽤 성공적인 편이었다. 모 자산운용사의 중국펀드가 대세라며 너도나도 펀드에 ‘몰빵’하던 그때, 이미 나는 가입했던 채권형과 주식형, 국내 및 해외 펀드를 환매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3월, 펀드 하나를 들어도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져묻던 나를 무장해제시키고 ‘묻지마 투자’를 하게 만든 펀드가 나타났으니…. 이름하여 바로 ‘맨땅에 펀드’. 정원은 100명, 1인 1계좌로 30만원씩, 총 자산운용규모 3000만원인 이 소규모 펀드의 정체는 뭘까? 투자설명서부터 살펴보자. “호랭이 똥구녕을 씹어불란게”란 살벌한 멘트를 날리시는 다라이 든 할머니가 표지모델로 등장한다. 이 분은 최소 30년에서 최대 50년..
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herland@naver.com 이영훈의 단편 소설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소녀시대는 기적 같은 존재였다. 복통마저도 소녀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가라앉고 있었다.” G20 세계정상회의 때문에 화장실이 폐쇄된 아케이드 내에서 갑작스러운 변의를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소녀시대 생각에 잠시 통증을 잊게 되는 주인공의 말이다. 소설에서 아케이드는 배설이 은유하는 개인들의 다양한 욕망에 대한 규제로 매끈하게 위생 처리된 문명 시스템을 구조화하고, 소녀시대는 그 안에 은폐된 억압을 잊게 하는 판타지로 기능한다. 소설은 주인공의 복통과 진통제로서의 소녀시대를 통해, 힘겨운 현실에 대한 힐링 판타지로서의 아이돌에 도취된 지금의 우리 사회를 증후적으로..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창작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송강호의 애드리브라고 알려진 영화 의 대사다. 연이어 성범죄가 보도된다. 차마 입에 올리기 싫은 사건이 방송과 신문과 인터넷에 가득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도 성폭행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난 깜짝 놀란다. ‘강간’ 같은 단어를 말할 때면 마음이 편치 않고 옆에 누가 있는지 눈치도 살피게 되는데, 요즘은 뉴스만 틀면 성범죄의 세부 과정이 다 등장한다. 그러니 초등학생 아이들의 대화에 성폭행 사건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다. 정말 우리나라가 강간의 왕국이 된 걸까? 인터넷에서 ‘한국, 성범죄’라는 두 키워드로 검색해 보기만 해도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범죄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고, 다른 나..
정지은 | 문화평론가 “언니야, 혹시 남는 영수증 있어?” 세일기간이라 혼잡한 백화점, 친근하게 말을 붙여온 아줌마는 20만원을 구매해야 주는 1만원 상품권을 받고 싶은데 5만원쯤 모자란다며 남는 영수증을 요구하신다. 일종의 영수증 호객행위다. 연말만 되면 인터넷에서 보이는 ‘스벅 스티커’를 구한다는 광고와 비슷하다. 12개의 스티커를 모으면 1만2000원인 스타벅스의 다이어리를 공짜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인데, 스티커를 모을 수 있는 기간이 짧고, 특정 음료를 3잔 이상 마셔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서로 돕자는 취지다. 너무 합리적이어서 눈물이 다 난다. 요즘은 20만원을 구매해도 1만원 상품권을 받기 위해서는 충족해야 하는 조건이 많다. 일단 그 백화점 계열사의 신용카드나 최소한 포인트 카드라..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2리에는 500여 사람이 삽니다. 이분들 중에는 50년째 이발소를 운영하는 주인장이 있어요. 외관부터 소품까지 모두 근대 박물관인 이발소를 지키며 강화 토박이로 살아온 67세 이발사는 숨 쉬는 역사 교과서예요. 과묵한 인상과 달리 입만 떼면 강화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지요. 직접 키운 순무와 신선한 야채를 파는 천막 가게의 67세 주인장은 전에 물레 양장점을 오래 해서 동네에선 “물레야~”로 불려요. 쾌활하고 붙임성 좋은 주인장은 도시에서 온 낯선 청년들에게 순무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길가다 훈수 두는 이웃들을 끌어들여 잔치판을 벌이지요. 배우는 청년들보단 사실 이분들이 한 가득씩 순무 김치를 휘리릭 버무리고 끝낸답니다. 분홍색 지붕집에서 ..
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요즘 가장 뜨거운 화제의 드라마는 tvN 이다. 33세의 방송작가 시원(정은지)이 고등학교 동창회를 계기로 ‘찬란했던 90년대’와 10대 시절을 돌아보는 내용의 이 드라마는, 최근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 중인 1990년대 회고담에 속한다. 특히 이 작품은 당시 급부상하던 아이돌과 10대 팬덤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환함으로써 단순한 유행상품을 뛰어 넘는 독특한 개성을 획득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은 소위 ‘빠순이’ 문화로 폄하돼온 팬덤 문화, 더 나아가 소녀문화 중심으로 재해석한 90년대 이야기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의 1997년은 외환위기, 첫 정권교체 등 정치·경제·사회적 이슈 못지않게 중요한 아이돌의 해로 호출된다. 바로 그 전 해인 1996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창작 1990년대 중반, 만화가 좋아 만화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글을 쓰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일간지 신춘문예 만화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순전히 ‘운빨’이라고 생각한다. (신춘문예 만화평론은 다섯 해인가 지속됐다가 사라졌다.) 햇병아리, 얼치기 평론가이지만, 다른 글쟁이들의 만화에 대한 비유는 영 거슬렸다. 특히 영화평에 자주 등장한 문장이었는데, 뭔가 이야기 전개가 느슨하거나 황당한 연출이 등장하면 어김없이 ‘만화 같은’이라는 수식이 등장했다. 난 이 수식을 참 싫어했다. 만화를 무시한다고 분개하기도 했고, 그런 표현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자본과 비평이 만나 활짝 피어나던 영화산업, 영화문화가 부러웠고 배아팠다.만화 같은 영화, 만화 같은 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