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만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도 지구공동체를 이끌려면 강한 힘과 함께 합당한 뜻을 품어야 한다. 핵심 제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미국이 아직도 세계를 이끄는 힘은 군수, 금융, 정보산업 덕이라 한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미국을 떠받치는 동력은 다원성에 기초한 자유와 민주라는 보편적 이념이다. 미국의 역사가 짧다고들 하지만 그들만큼 빠르게 민속과 민족이라는 피의 공동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다원적 공동체를 실현한 국가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 경찰국가 행세를 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지만 미국은 여전히 지속가능한 자유와 민주의 땅이라고들 한다. 미국이 보여준 자유와 민주는 비록 인류가 꿈꾸어야 할 최대 이념은 아니지만 공존을 위해 인정해야 할 최소 이념임이 분명하다. 한때 중국..
우기(雨期)라고 해도 남쪽은 온통 마른장마다. 열흘째 비소식은 없고, 그야말로 깡깡깡, 내려 퍼붓는 노란 볕살 일색이다. 더구나 내 집은 지붕이 낮은 한옥인 탓에 마치 그 혹서(酷暑)의 기운이 압축되기라도 한 듯 턱턱, 숨을 막는다. 씻고 벗고 선풍기 바람 쐬고 하느라 정신조차 산란하다. 어떤 러시아 기상학자는 사적 유물론보다 외려 태양의 흑점이 인류사를 더 좌우한다는 논지의 글을 발표한 적이 있어, 한편 고소를 금치 못하기도 했지만, 특별히 생태학적 이력이 적은 나도 근자에는 이런 주장에 차마 동조할 뻔했다. 당연히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의 관념론을 온전히 신앙하지는 않지만, 몸과 마음의 융통과 습합이야 다 아는 터, 외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리면서, 이른바 ‘슬금한 관념론’의 길에 나서..
우리의 영혼은 시를 통해서 무덤 너머에 있는 모든 찬란한 것들을 엿볼 수 있다고 보들레르는 말했다. 이때 ‘무덤 너머’라는 말은 물론 ‘죽음 이후에’라는 말인데, 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우리의 정신이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모든 물질적인 제약을 벗어버린 후에’라는 뜻이 된다. 사후세계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보들레르가 생각했을 한 점 티끌도 없이 완전히 찬란한 어떤 빛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보들레르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죽음 뒤에 얻게 될 휴식처를 상상했고, 동반 자살한 연인들이 죽음 뒤에 이루게 될 완전한 사랑을 꿈꾸기도 했다. 죽음 속에서만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적은 없다. 이 세상에서 그 빛을 볼 수는 없..
몇 해 전 여름 어느 모임에 참가하느라 숲속 깊은 곳에 있는 숙소에 묵었을 때 일이다. 이른 아침 옆방에서 울려오는 휴대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새 지저귀는 소리로 설정된 그 신호음은 2~3분 계속 울려댔다. 도대체 이런 곳에까지 와서 이른 시각에 일어날 일이 뭐가 있는가. 그리고 소리가 울리면 빨리 깨어나서 끌 일이지 왜 다른 사람들의 단잠을 설치게 하는가. 짜증이 났다. 그런데 잠을 포기하고 방을 나섰을 때,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것은 진짜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였다. 숲속에 있는 새 한 마리가 나를 깨운 것이다. 방금 전까지 성가셨던 소리가 이제는 고마운 선물로 다가왔다. 인지는 습관의 지배를 받는다. 시청각 정보를 수용하는 틀이 생활환경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미가 ..
내용만 보면 안철수의 새 정치는 헌 정치에 가깝다. 그의 정책 방향과 판단은 대체로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중간이라기보다 오히려 후자에 가깝다. 그러나 형식이나 절차를 보면 진보당보다 더 민주적이고 그만큼 새롭다. 이렇듯 이념이 밋밋한 정치는 권력에서 멀어지는 순간 분해된다. 최장집 교수가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생소한 이념으로 안철수 신당을 포장하려는 이유다. 자유는 철학하는 나에게 목숨만큼 귀한 이념이다. 자유는 한갓 낱말이 아니라 정신(넋과 얼)이 살아 숨쉬는 삶의 상징이다. 그러니 정신 차린 사람이라면 그 무엇과도 자유를 바꾸지 않는다. 자유를 무시하는 사랑이나 행복이라면 포기해야 한다. 자유 없는 사랑이 넋 나간 몰입이듯 자유를 잃은 행복도 얼빠진 체념일 뿐이다. 그래서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의 목을..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는 제 깜냥껏 혁명가의 노릇에 투철했으면서도 신비체험에 노출되곤 했던 모순덩어리의 존재였다. 그녀의 짧은 삶과 기이한 죽음은, 성속(聖俗)을 일관해서 지켜나가려 했던 어떤 ‘정화된 의욕’을 증거한다. 신(神)이라면, 그 발톱조차 잘 보이지 않는 이 시대에, 그녀가 검질기게 유지했던 어떤 종류의 ‘세속적 경건’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에 가능한 ‘영혼의 길’을 톺아보게 된다. 자본과 기계들에 뒤덮인 채 이제는 자욱길이 되어버린 그 인간의 길, 말이다. 그녀는 그 신비체험의 한 사례로 그리스도가 친히 강림해서 자신의 손을 잡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물론 이런 식의 체험은 별스러운 게 아니다. 그리스도와 부처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이 그 신자들의 정성에 현신응대..
내가 한국일보를 구독하기 시작한 것은 김훈, 박래부 두 기자가 번갈아서 ‘시를 찾아서’를 연재하고 있을 때이니, 1980년대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문학비평가가 되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를 하던 나는 그 연재를 꼼꼼히 읽었고, 자주 메모도 해두었다. 박래부 기자의 글은 진중하고 철학적이었고, 김훈 기자의 글은 경쾌하고 감각적이었다. 나는 두 기자의 문체를 모두 좋아했다. 내가 매우 늦은 나이에 비평가로 문단에 나왔을 때는 김훈이 한국일보를 떠난 뒤였다. 그는 이미 널리 알려진 문장가였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신인 비평가였지만, 그와 내가 같은 시기에 같은 대학을 다녔다는 이유로 둘을 엮어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는 그런 이야기를 유쾌한 마음으로 들었다. 내가 한 문학잡지의 편..
한국의 길거리나 대중교통 공간에서 종종 보게 되는 광경이 있다. 항공사 스튜어디스들이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마주치기 어려운 모습이다. 한국에서도 근무복을 입고 출퇴근하는 직종은 거의 없다. 그들은 왜 평상복으로 갈아입지 않을까? 자기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스튜어디스는 소녀와 젊은 여성들에게 대단한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데 최근의 어느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감정노동의 강도가 가장 센 직종이 스튜어디스라고 한다. 얼마 전 항공기 일등석에서 어느 대기업 임원이 물의를 빚은 것은 정도가 너무 지나쳐 터져 나온 빙산의 일각인 듯하다. 생각해보면 서비스 분야에서 그렇게 값비싼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들을 한꺼번에 응대해야 하는 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