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의 나는 무엇이었던가? 나는 오늘날에야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된다. 이제는 방랑자도 없고, 이제는 이유가 불분명한 전쟁도 없다. 열등 민족이 모든 것을 덮고 있다.” 천재시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랭보가 그의 산문시집 의 ‘나쁜 피’에 썼던 말이다. 랭보는 인류가 진보한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자기처럼 좋은 혈통을 물려받지 못한 평민이 역사적으로 자의식을 갖게 되고, 거지의 행렬이나 다름없는 유랑자의 무리들이 사라졌으며, 귀족 영주들의 땅따먹기일 뿐이었던 전쟁이 없어진 것 따위가 진보라면 진보라고 생각했다. 랭보의 이 생각이 전적으로 맞는 것은 아니다. 유랑민들은 사라졌지만, 이 시집이 인쇄된 시기를 전후해서 이주노동자와 이민노동자들이 유럽의 대도시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전쟁에 대해서..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일본의 후지산이 300년 만에 다시 폭발할 조짐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보다 충격이 훨씬 더 클 것이라는 백두산 폭발의 징후들은 진작부터 포착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인간에게만 치명적인 신종 변형 조류 독감이 전염되면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재난은 기존의 설명 체계와 대처 방식을 무색하게 한다. 2년 전 일본의 3·11 대지진도 그러했다. 원전 사고가 너무 끔찍해서 지진 그 자체는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당시에 지층이 흔들린 메커니즘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일본 지진학자들도 전혀 알지 못한 것이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연구 끝에 ‘메가 어스페러티(mega-asperity)’라는 새로운 모델을 내놓았다. 자연과학과 공학에서 놀라운 혁신이 거듭되고 있지만, 거대한 ..
윤지관 |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꽃샘추위가 오히려 움트는 꽃들을 예찬하는 듯한 초봄에 천안함 3주기를 맞게 됐다.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꽃피는 나이의 젊은이들임을 상기하면 봄은 역시 잔인한 계절이다. 물론 지난 며칠 동안 이들을 애도하는 언사들은 넘쳐났다. “조국에 몸 바친 젊은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애틋한 사랑”이니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 순국한 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예찬되고, 국가적인 규모의 추도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추모의례가 대개 그렇듯 이번 3주기도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산 자들의 자기주장을 위한 빌미가 된 것도 사실이다. 용사니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이 죽음을 앞세워 안보위기와 대북 적대감을 고취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실려 있다. 더 나아가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를 ..
김영민 | 철학자 나는 어떤 운전자를, 그리고 그의 운전술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처럼 선명히 기억한다. 그는 당시 두 명의 늦둥이를 둔 40대 중반의 목사였는데, 가난한 유학생이던 나는 한 시간 남짓의 교회길을 그의 차에 동승한 채 곁붙어 다니곤 하였다. 당시의 동승자는, 나 이외에도 그의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었다. 워낙 도로 사정이 좋은 덕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차 안에 있는 내내 나는 내가 이질적인 차체(車體)에 얹혀 있다는 실감을 한 적이 없었다. 운전은 그가 혼자 했지만, 나를 포함한 동승자들은 그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면서도 그 의도에 의해 내팽개쳐지는 일이 없었다. 몸이 기울어져서 얻는 소격감(疏隔感)이 없이 우리 동승자들도 그 운전에 완벽히 일체로 동화되었고, 마치 집 안에 있는 ..
문광훈 | 충북대 교수·독문학 진실에도 표면적 차원과 심층적 차원이 있다면, 한국사회는 여전히 표면적 사실적 차원의 진리도 어떤 점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시민적 문화적 가치의 실현이 지체되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무기중개상 고문이었던 사람이 국방장관을 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여기서 파묻히는 것은 진리의 깊고 넓은 차원이다. 삶에는 보이는 진리밖에 없는 것일까? 영화 (1982)이 다룬 주제도 그런 것이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한 여자의 삶을 그린 이 영화에서 두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소설가 지망생 스팅고가 소피와 처음 만나던 날, 타자소리가 싫다면 밤에는 안 치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말한다. “어린 내가 잠들었을 때, 아버지도 늘 밤에 타자를 쳤어..
황현산 |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호남지방에 내려가 웬만한 식당에 들어가면 스무 가지 서른 가지 반찬이 그득하게 차려진 밥상을 받을 수 있다.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호남 사람들이, 비록 부잣집에서라고 하더라도, 일상적으로 그런 밥상을 차려 놓고 먹었던 것은 아니다. 내 아버지 세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런 차림은 일제 강점기에 목포나 군산 등지 미두장에 투기꾼들이 모여들면서 생겨난 여관의 밥상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잔칫집 같은 데서 ‘이게 여관집 밥상인가’하며 불평하는 어른들을 본 적이 있다. 차린 것은 많은데 먹을 것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요즘 빈 시간에 여기저기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이 ‘여관집 밥상’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냈다. 인터넷에서 얻은 것이 없는 것은..
박구용 | 전남대 철학과 교수 대한민국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어떤 특수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가지고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규율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민주적 방식으로 의견과 의지를 모아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통해 공동의 삶을 조율해야만 한다. 더구나 법은 도덕이나 종교보다는 약하지만 나와 너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연대의 원천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신치(神治)나 덕치(德治)가 아니라 오직 법치(法治)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법치에는 두 가지가 있다. 법에 의한 민주적 협치(協治)가 올바른 법치지만 법을 이용한 권력자의 억압적 통치도 법치라 한다. 그릇된 법치에선 권력자만이 법을 만드는 저자이고 국민은 단지 법의 수신자나 수혜자일 ..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대학에서 ‘노인교육론’이라는 과목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내주는 과제가 하나 있다. 주변에 계신 노인 한 분을 찾아가서 그의 생애사를 채록해오는 것이다. 자신의 조부모도 좋지만, 가능하면 낯선 분을 권한다. 친구의 조부모나 동네 어르신도 괜찮고, 대학의 청소부 아주머니나 아파트 경비원도 인터뷰 대상이 될 수 있다. 눈길과 발길이 닿는 범위 내에서 한 분을 정해 그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 여쭙고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정리하면 된다. 과제를 안내할 때 학생들은 시큰둥한 표정을 짓지만, 다음 시간에 와서 발표할 때는 대다수가 흥미로웠다고 소감을 말한다. 생각해보면 요즘 젊은이들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 귀를 쫑긋 세워볼 기회가 거의 없다. 더구나 50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세대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