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광훈 | 충북대 교수·독문학 방학이라 종일 집에 있다. 거실에 앉아 고개를 들거나 숨을 돌릴 때면, 시선은 자주 베란다 쪽으로 간다. 오색동백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달에 다녀온 남해안 여행에서 구해온 것이다.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라서, 청산도는 산보길이 많을 것 같아 찾아간 것이다. 내가 태어난 이 땅을 아직 잘 모른다는 것과, 내 공부에서도 어떤 근본적 전환이 절실하다고 여겨온 터였다. 내가 찾아간 남녘은 황량했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어딜 가나 해안과 산천이 참으로 많이 망가져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난 태풍의 여파인지 해안가는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조각으로 넘쳐났고, 산이나 계곡도 쓰다 버린 온갖 기자재로 더럽혀져 있었다. 편리한 도로나 시설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이런 폐기물을 동반한..
박구용 | 전남대 교수·철학 사람은 왜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열정을 배우는 데 쓰는가? 이유는 하나다. 앎이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손에 든 물조차 그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아야 마실 수 있다. 그러니 배움은 자유를 향한 열망이고, 앎은 그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런데 앎은 자신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을 억압하는 힘, 곧 폭력도 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문화 공동체는 억압의 힘이 아닌 자유의 힘으로 앎이 쓰이도록 교육을 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직업이 생겨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교육자만큼 경이로운 직업은 없다. 특히 배움 그 자체를 즐기는 학자로 살면서 동시에 일주일에 아홉 시간, 일 년에 270시간을 청춘들과 함께 자신이 연구한 것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
윤지관 |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미국과 한국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며칠 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80만명의 미국 시민들 앞에서 취임연설을 했고, 박근혜 당선인은 취임식을 준비 중이다. 두 나라 모두 집권세력이 정권재창출에 성공했다. 물론 전자는 재선에 성공한 데 비해 후자는 현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내세우며 당선된 점이 다르긴 하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두 사람 다 선거과정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국민통합이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국민들을 통합해내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 통합이라는 말만큼 의미를 확정짓기 어려운 것도 드물 법하다. 다같은 국민이라도 서로 차이도 있고 차별도 존재한다. 적대관계가 있고 때로는 사활을 건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통합..
문광훈 | 충북대 교수·독문학 사람을 많이 만나는 편이 아니지만, 연말 연초에는 모임 횟수가 잦았다. 하지만 주제는 어디서나 돈이고 ‘1등급’과 아파트 시세다. 선배 동료와의 만남에서도 이 주제는 빠지지 않고, 일가친척 사이에서는 더 자주 등장한다. 하는 일과 관심사가 다르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얘기 나누기가 더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생각이 꼭 옳은 것도 아니다. 또 반드시 전해야 할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두 마디 이어지면 서로 딴곳을 쳐다보고, 재차 물으면 고개를 돌리고 만다. 사실을 정확히 알기보다는 대충 듣고 대충 말하다가 시간이 되면 황급히 일어선다. 옳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다른 세상 일인 것 같다. 우리는 왜 만나고, 무엇을 위해 만나는 것인가? 그럼에도 나는 이들로부터 이..
박구용 | 전남대 교수·철학 끔찍한 비상상황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사태가 갑자기 찾아온 예외적인 상태는 아니다. 벤야민의 말처럼 바닥에 때려눕혀진 사람들, 수렁에 빠질 위협에 노출된 사람들에게는 삶 자체가 언제나 비상사태다. 그러니 냉소와 자학을 멈추고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보아야 한다. 더구나 짓밟힌 사람에겐 짓밟은 이에 대한 증오나 응징보다 제 발로 일어서는 것이 먼저다. 87년 체제가 들어서기 전에 진보와 보수가 맞짱을 뜬 경우는 없었다. 맞대결을 할 만큼 진보 세력이 크지 못했으니 선거판은 항상 수구와 보수의 대결로 짜여졌다. 87년 이후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진보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에 맞서 수구와 보수는 3당 합당으로 35%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구축함으..
윤지관 |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이번 대선 결과를 두고 여러 해석들이 나오는 가운데 세대 간 갈등에 주목하는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결국 세대별 투표율 차이가 승패를 가름했기 때문이다. 젊은 층의 참여도 높아졌지만, 50, 60대의 경이적인 투표율 상승이 박빙의 국면을 한쪽으로 기울게 했다. 변화와 개혁을 원하는 젊은 세대의 꿈이 늙은 세대의 손에 깨지는 것을 보고 착잡한 심경에 빠진 사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노인세대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 표출에서부터 고령화에 따른 사회의 보수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치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년의 자기주장이 이처럼 현실에서 위력을 발휘한 사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나이든다는 것은 축복이 아..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 얼음처럼 빛나고, /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 가장 높은 정신은 /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 산정(山頂)은 /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 빛을 받들고 있다. (조정권 ‘산정묘지’ 중에서) 북반구에서 연말은 언제나 춥다. 먼 옛날, 달력을 만든 사람들은 한 해의 끝과 시작을 왜 겨울에 배치했을까. 지나온 일 년을 돌아보고 다가올 한 해를 내다보는 시선은 혹한의 날카로움 내지 투명함을 닮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 다른 계절들과 마찬가지로 겨울도 그 정취를 맛보려면 바깥으로 나가 누리..
문광훈 | 충북대 교수·독문학 mulmuni@chungbuk.ac.kr 이제 나흘 후면 18대 대통령이 결정된다. 지금 단계에서 한국 사회에 필요한 덕목은 많지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그 덕목이 무엇이건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나가야 할 모습은 어떤 것인가? 나는 공동체의 품위를 생각하고, 이 공동체를 구성할 품위 있는 인간을 떠올린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은 이런 인간 유형을 잘 묘사한 듯하다. 지난 한 달 정도 나는 디킨스를 읽으며 즐거웠다. 주말에는 하루 종일 그의 소설을 읽으며 보냈는데, 정말이지 시간가는 걸 잊을 정도였다. 그는 산업화 초기 영국의 비참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가감 없이 묘사한 리얼리즘 작가로 흔히 분류되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그의 소설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진 것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