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교회가 성경적 근거도 없이 대면 예배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反)정부’를 실천하려는 것도 헌금 수납을 위한 것도 아니라면, 혹시 목사님들에게 거울이 필요해서는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는 에서 남자들은 자신을 두 배 더 크게 비춰주는 여자라는 거울 덕분에 최악의 순간에도 자기애를 유지할 수 있다고 냉소했다. 어떤 목사들은 신도라는 거울 앞에서, 두 배가 아니라 신만큼이나 거대해진 자신을 비춰보는 만족감을 누려왔을 것이다. 아멘, 언제나 당신이 옳다는 외침에 둘러싸여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했으리라. 감히 정부가 행정명령 따위로 제국의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 불쾌했으리라. 아마도 그런 교회일수록 카리스마적인 목사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것도 카리스마라면 말이다. 아니, 그것만큼 카리스마와 거리가 먼..
어쩌다 작품 합평을 하게 되면 학생들에게 권장한다. ‘한 가지를 비판하고 싶으면 먼저 다섯 가지를 칭찬하라.’ 김연수 작가의 책에서 ‘인간은 긍정적 신호보다 부정적 신호를 다섯 배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물론 기계적 균형을 맞추라는 뜻은 아니다. 동료의 잠재력을 찾아내 보려는 태도의 가치를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인위적으로 상처를 입혀야 누군가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낡은 생각일 수 있다. 성장은 자신을 알게 되는 체험인데, 그가 제 작품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자기도 잘 아는’ 단점이 아니라 ‘자기는 잘 모르는’ 장점이다.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단점을 하나씩 없애서 흠 없이 무난한 상태로 변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와도 다른 또렷한 장점 하나 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이..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전국에 수만명은 되겠지만, (1939)는 나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그 덕분에 나는 초등학생이던 때에 이미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을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었고(어쩌면 클라크 ‘케이블’이라고 발음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 운운하는 대사를 외우기까지 했다. 어머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에게도 이 영화는 아련한 향수의 대상이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 우리 모자(母子)는 언제나 백인이었다. 물론 이제는 안다. 내 또래의 어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이 영화는 나의 어머니가 가장 싫어한 영화였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워너미디어’의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가 론칭되자 <노예..
‘임을 위한 행진곡’은 행진곡이다. 역사를 전진하게 하고 그 자신도 거듭나는 노래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서 공개된 정재일 편곡 버전을, 훗날 고전이 될 작품의 초연 현장에 있는 기분으로 들었다. 원곡의 멜로디를 장조로 바꿔 부른 에필로그 파트에서 정훈희의 목소리로 박창학의 가사가 노래될 때는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탁월한 예술가들 덕분에 새삼 이 노래에 대해 생각했다. 한자어 ‘존재’가 ‘있는 자’이면서 ‘있음’ 자체이기도 하듯이, 우리말 ‘임’도 ‘있는 자’로서의 ‘당신’을 뜻하면서 ‘~이다’의 명사형인 ‘임(있음)’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당신’을 위한 것이자 ‘있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리라. ‘어떻게 있을(살) 것인가’에 관한 노래라는 것이다. 잘..
비극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연민과 공포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진단이다( 6장).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잤는데 그걸 뒤늦게 알고 울부짖다가 제 눈을 찔러버리는 남자의 이야기, 그런 것을 그리스인들은 야외극장에서 보았고 연민과 공포를 느꼈다. 둘 중 하나를 특별히 강하게 느끼는 인간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고대의 연극론은 인간 유형론으로 전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연민의 인간’과 ‘공포의 인간’이 있다고 말이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 ‘타인’에게 닥친 비극을 동정하느라 진이 빠지는 연민의 인간과 ‘자기’에게 닥칠 비극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전율하는 공포의 인간은 서로 다른 결심을 하며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을..
고통의 차별이 있다. 차별의 고통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니다. 차별이 고통을 낳는데, 그 고통조차도 차별적으로 다뤄진다는 뜻이다. 고통의 차별이 차별의 고통을 완성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우리가 모든 고통에 차별 없이 감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개별 고통의 양을 최대한 정확히 측정할 수 있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의 높낮이를 정확히 잡아내는 절대음감처럼,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는 절대통감이라는 것을 갖추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상상을 조롱한다. 실제의 고통값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평가되는 고통들이 있다. 몰랐던 것은 아닌데, 국민청원 게시글 하나가 새삼 이런 생각에 빠지게 했다. 이미 보도된 대로 조주빈에게 살인을 청부한 공익근무..
‘신천지’의 자체 추산 30만 교인 중에는 특히 청년세대의 비율이 높다고 들었다. 다른 교단에 비해 유난한 숫자라고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학생들 중에도 그 근처까지 갔다가 빠져나온 사례들이 있다.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솔선할 일꾼이 필요하므로 애초부터 젊은층을 타깃으로 포교한다는 것이었다. 취미 활동 혹은 상담 프로그램으로 위장하여 마음의 빗장을 먼저 열고 교리는 그다음에 주입한다고도 했다. 이런 사전 정지(整地) 작업이 있다고는 해도 그다음 단계에 이윽고 접하게 될 그들의 교리는 정상적인 사유 능력의 소유자가 빠져들 법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늘어나는 확진자 숫자를 근심하는 한편, 나는 그 청년들에 대해서도 며칠을 생각했다. 신앙 없는 문외한이지만 기독교는 이런 것이라고 알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