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7년 정도 되니 당신조차 이렇게 말하네요. 세월호, 이제는 지겹다고요. 애덤 스미스가 오래전에 쓴 (1759)이 생각납니다.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동감 현상(국역본들이 ‘sympathy’를 ‘동감’으로 옮기네요)은 타인의 비애보다는 환희를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동감의 상태에서 느끼는 감정의 강도도 비애보다는 환희 쪽이 크다고 적혀 있습니다. 요컨대 타인의 슬픔은 함께 느끼기 쉽지 않고, 느껴도 내 감정의 양이 작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특별히 나쁜 사람은 아닐 겁니다. 평범하다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겹다는 말이, 눈에 띄지 않게 어디 가서 조용히 죽어버리라는 말로 들릴 유가족이 있습니다. 우리의 평범함 때문에 죽어도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
정부의 종합부동산세(이하 종부세) 정책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자행한 폭력과 닮았는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만평이 매일신문 3월18일자에 실렸다. 만평을 그린 모 화백은 지금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저 비유일 뿐이라고 말이다. 폭력을 옹호하거나 피해자를 모독할 뜻은 없었으며, 그저 현재의 ‘안 좋은 것’을 과거의 ‘안 좋은 것’과 연결해 놓았을 뿐이라고, 즉 악의는 없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잘못은 악의가 아니라 무지에 의해서도 행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유를 두고 ‘대상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해내는, 타고나는 능력’( 22장)의 소산이라 드높인 것은 그만큼 비유가 성공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만평은 실패한 것 같다. 어디서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따져보는 일은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이 ..
급기야 ‘K신파’라는 말까지 나오고 말았다. 한국영화가 ‘눈물을 짜내는 플롯·연출’에 의존한다는 힐난이 담겨 있는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소비자가 싫다는데도 생산이 멈추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지 않을까. 싫다는 사람이 시장에서 소수이기 때문이다. 신파는 한국의 대중서사 소비 집단을 다수파와 소수파로 구획하는 기준이 된 것 같다. 신파로 분류되는 것들 중에서 특히 소수파의 거부감이 심한 소재는 ‘부모의 희생’으로 보인다. 등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의 본의 아닌 공통점이 그것이다. 여기서 여러 질문이 발생한다. 첫째, 한국영화에서 부모들은 왜 희생되는가. 둘째, 왜 다수의 관객들은 그것을 기꺼이 용납하는가. 셋째, 소수의 반대자들은 누구인가. 한국영화에서 부모가 자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실..
한국어 문화의 가장 큰 약점은 호칭일 것이다. 관계 형성에 악영향을 끼치는 지독한 결점이다. 몇몇 기업에서는 수평적 소통을 위해 이름이나 별명 뒤에 ‘님’을 붙여 부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가족과 친구가 아니라면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상호 지위 관계를 표시하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낯선 사람과 소통을 시작할 때는 이름을 모를뿐더러 서로 높낮이를 정하기도 어려우니 호칭을 택하기 더 어렵다. 집배원, 택배노동자, 경비원, 환경미화원, 요양보호사, 종업원 등은 호칭이 아니라 명칭이다. 여기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고 어색하게도 느껴진다. 아저씨, 아줌마, 이모, 저기요, 라고 부르면 미안해지지만, 높여 불러보자니 마땅한 말도 없는 데다 과공비례(過恭非禮)가 될까 주저된다. 같은 한국..
좋은 글은 ‘취향’이나 ‘입장’보다는 ‘인식’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언제나 믿고 있지만, 올해의 마지막 글이니까, 취향을 드러내는 일이 한 번 정도는 용서되었으면 싶다. 아마도 주관적일 ‘올해의 책’ 목록을 적어보려고 한다. 이미 언론을 통해 선정된 책들은 넣지 않았다. 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책도 뺐다. 외서(外書)로 한정한 것은 지면이 넉넉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번역자와 출판사의 이름을 또박또박 눌러 적었다. 다 따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책을 많이 만드는 번역자와 출판사들이다. 언제나 수고와 가치에 비해 보상은 적은 일을 수행하는 이 이름들을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 이 글은 나대로 연말 결산을 하고 출판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지만, 광고로 읽힌다 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고 느..
지구 양쪽의 극지처럼, 우리는 반대편에서 서로를 본다. 함께 살 수 없는 북극곰과 남극펭귄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산다. 모두 알다시피 이를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말문을 열면 고고한 양비론을 펼치려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니다. 불가피하게 양극화될 수밖에 없는 사안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그렇지 않은 사안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 둘이 구별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법안과 정책은 언제나 찬반 승부의 대상이 되고 뉴스엔 딱 두 종류의 댓글만 달린다. 2000년대 이후 급격해진 이 현상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연구가 많지만, 전문가가 아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북극곰과 펭귄이 서로 몰라도 될 것들을 모르는 채로 살았더라면 서로 이렇게까지 미워하게 되었..
1980년 5월 광주에 바쳐진 소설 (2014)의 독일어판 출간을 앞두고 독일 취재팀이 내한했을 때 작가 한강은 그들과 국립5·18묘지를 방문했다. 무덤들 사이를 거니는 작가를 영상에 담고 싶다는 취재진에게 한강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중히 사양한다. “저는 그냥 한 권의 책을 쓴 것뿐인데요. 저에게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는 그저 ‘한 권의 책’만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5·18 훼손 시도에 준엄한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큰일을 했다. 누적 판매량 40만부를 넘겼고 구매자의 80%는 2030 청년들이라고 한다. 이 책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1985년 이래로 교과서 역할을 해온 의 개정판(2017)이 잇따라 나왔을 때는 쐐기를 박는 듯해 통쾌하기까지 했다. 이미 몇 번 읽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라는 말은 감미롭게 들렸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이런 걸 보장해주다니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희미하게나마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느낌은 있다. 그러나 예전에 나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행복할 권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듯싶다. 국가가 국민에게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어서 일일이 보장해줄 수 없다. 당신이 행복을 무엇이라 생각하건,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돕겠다는 말일 뿐이다. 그래서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추구권’이다. 1776년 미국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