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근육을 잡느라 하루를 다 썼네 손아귀를 쥘수록 속도가 빨라졌네 빗방울에 공백이 있다면 그것은 위태로운 숨일 것이네 속도의 폭력 앞에 나는 무자비했네 얻어맞은 이마가 간지러웠네 간헐적인 평화였다는 셈이지 중력을 이기는 방식은 다양하네 그럴 땐 물구나무를 서거나 뉴턴을 유턴으로 잘못 읽어보기로 하네 사과나무가 내 위에서 머리를 털고 과육이 몸을 으깨는 상상을 하네 하필 딱따구리가 땅을 두드리네 딸을 잃은 날 추령터널 입구에 수천의 새가 날아와 내핵을 팠던 때가 있었네 새의 부리는 붉었었네 바닥에 입을 넣어 울음을 보냈네 새가 물고 가버린 날이 빗소리로 저미는 시간이네 찰나의 반대는 이단(異端)일세 아삭, 절대적인 소리가 나는 방향에서 딸의 좌표가 연결되는 중이네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들어 올리는 내가..
삶이 유난히도 거칠고 가파른 사람 있듯이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며 밤새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있나니 너는 어미 아비 없이 먼 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아이 너는 갖은 소외와 적막 속에 혼자 웅크리고 세월 견디는 새터민 너는 태어난 곳 멀리 떠나와 낯선 땅에 정 붙이는 다문화 여인 너는 주인도 사랑도 잃고 날마다 길거리 헤매 도는 떠돌이 개 온갖 거짓과 시련 속에 이 밤에도 외로워 흐느끼는 홀로섬 사람들 와글와글 몰려와 사진 찍고 만세 부르고 떠나가는 독도 이동순(1950~ ) ‘섬’이라는 말에선 외로움이, ‘끝’이라는 말에선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동쪽 바다 끝에 ‘홀로섬’ 독도가 있다. 이동순 시인은 독도만으로 시집 한 권을 냈다. “한 번도 완전독립을 이뤄 보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올바른 독립을 이루라는”..
참외를 먹다가 나도 모르게 참외 씨를 삼켰다. 아아, 큰일 났다. 낼모레 내 몸에서 참외 싹이 파랗게 돋아날 테니. 여름 텃밭 줄줄이 뿌려 심은 며칠 만에 파란 싹 뾰조록이 나오던 배추 씨처럼. 어떡하나,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참외 씨를 꿀꺽 삼키고야 말았으니. 강인한(1944~ ) 언덕 위에 밭 한 뙈기 있었다. 태어나 처음 가져본 우리 땅이었다. 그해 그 땅에 고추를 심었는데, 어느 날 밭 가장자리에 개똥참외 하나가 허락도 없이 더부살이하고 있었다. 노랗게 익을 때까지 침을 꼴깍이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마침내 다 익었다 싶을 즈음 밭에 가봤더니 누군가 벌써 따먹고 없었다.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동심이 밭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희수(喜壽)의 시인은 동심으로 돌아간 듯 천진하다. “나도..
어린 연어가 먼바다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짓는 어미, 그 물이 1급수인 것은 어미가 흘린 눈물 때문이다 새끼들이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목숨을 걸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미의 눈물이 그리워서다 이종섶(1963~) 이별은 슬프다. 자식과의 이별은 더 슬프다. 그것이 영영 이별이라면 흘리는 눈물은 피눈물이다. 가다가 한 번쯤 뒤돌아보는 것은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나를 좀 붙잡아달라는 복잡한 심경이다.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여 손을 흔드는 것은 사랑이다. 모질고도 가없는 모성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연어는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에 이르는 동안 성체가 된다. 다시 “목숨을 걸고” 모천을 찾는 것은 그 자리에서 어미가..
여기까지 오느라 날 저물었구나 한 생애의 중노동이 생피 같은 노을 속으로 뭉쳐져 사라진다 잉잉거리며, 우글거리며 하루살이 떼는 채송화 꽃씨처럼 잘게 흩어진다 꽃씨? 그래, 꽃씨지! 끝 무렵에는 총 맞은 꽃씨 되자 꽃씨처럼 터지는 화약을 안고 생피 같은 노을 속으로 뭉쳐져 사라진다, 하루살이 떼 조창환(1945~) 저녁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하루살이에겐 죽음을 준비하는 경건한 시간이다. 노을이 지면 수컷들은 무리를 지어 춤을 추고, 암컷들은 그 속으로 뛰어든다. “노을 속으로 뭉쳐져” 혼인비행을 한 하루살이 부부는 산란 후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만남부터 생산, 죽음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건 인간의 시간개념일 뿐이다. 시인은 하루살이의 저녁에서 “한 생애의 중노동”과 왜소함을 떠올린다. 드..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 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문태준(1970~) 겨우내 비어 있던 밭은 따쓰운 봄볕에 꿈틀거린다.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생명이 초록을 밀고 나온다. 그들이 이 땅의 주인이지만 인간의 손은..
가수이자 배우였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말했다 ― 고개를 들어라. 각도가 곧 당신의 태도다 팝아트회화의 대가인 앤디 워홀은 말했다 ― 조각품은 모든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인생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종종 잊어버려서 문제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삼각형 각도는 정확히 ‘51도 52분’ 모래를 쌓을 때 가장 높이 쌓을 수 있는 각도. 넘어서면 모래가 더는 위로 쌓이지 않고 흘러내리는 각도다 고개를 들어 각도를 높이는 것 고개를 숙여 각도를 낮추는 것 시선 높이의 모든 각도를 한 바퀴 도는 것 각도가 곧 존재다 김경미(1959~)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또 고개를 들면서 일상을 살아간다. 어느 때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으로, 또 어느 때에는 자존심으로 살아간다. 고개의 높이, 시선의 높이가 곧 우리의 ..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엄만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행상(行商)이란다 너희들 오늘도 나와 있구나 저물어 가는 산(山)허리에 내일은 꼭 하나님의 은혜로엄마의 지혜로 먹을 거랑 입을 거랑 가지고 오마. 엄만 죽지 않는 계단 김종삼(1921~1984) 김종삼 시인은 시 ‘어머니’에서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아들 넷을 낳았다/ 그것들 때문에 모진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불쌍한 어머니를 위해 살아 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세상에 남길 만한/ 몇 줄의 글이라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종삼 시인의 시에는 이처럼 어머니의 존재가 여러 번 등장한다. 시인은 ‘지(地)’라는 제목의 시에서도 “모진 생애를 겪은/ 어머니 무덤/ 큰 거미의 껍질”이라고 써서 몹시 애통해했다.이리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