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백무산(1955~) 백무산 시인의 시 ‘낙화’에는 이런 시구가 나온다. “우리 몸에 낙화의 시간이 지워졌다/ 별이 뜨는 낙화의 시간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정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전력 공급이 수월하지 않은 나라에서 정전을 경험하면서 전력이 뚝 끊어진 그 시간 동안을 ‘낙화’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지속의 시간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문명 시대의 세태를 돌이켜보자..
담담해지고 싶다 말은 담박하게 삭이고물 흐르듯이 걸어가고 싶다 지나가는 건 지나가게 두고떠나가는 것들은 그냥 떠나보내고 이 괴로움도, 외로움도, 그리움도두 팔로 오롯이 그러안으며 모두 다독여 앉혀놓고 싶다이슬처럼, 물방울처럼 잠깐 꾸는 꿈같이 이태수(1947~) 바다의 일로 치자면 우리 내면에 일어나는 하나의 감정은 하나의 파도이다. 괴로움과 외로움과 그리움도 하나의 파도이다. 시인은 이 감정들이 가라앉기를 희망한다. 마치 풍랑이 지나고 다시 날이 화사해져서 바다가 잠잠해지듯이. 차분하고 평온하게, 말에도 허사(虛辭)를 줄이고, 걸음은 물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듯이 자연스럽게, 잊을 일은 잊고서, 무엇에도 지나치게 끌리지 않으면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쇠나 돌과 같은 서진(書鎭)으로 종이를 눌러놓듯이 거친 ..
머뭇거리지 마라 너의 무게는 어디에 내려놓아도 좋으리 아가 곁에 누워도 좋고 파지 한가득 싣고 가는 리어카 위도 좋고 고독한 방랑자의 발등이면 더 좋으리 생의 무게만큼 날아올라 암울함이 산란하는 낙도(落島) 어느 병상에 비처럼 뿌려지면 머뭇거리는 봄 햇살보다 더 좋으리니 너의 삶을 견인하는 바람이 오늘은 오래된 편지처럼 고독한 나의 창으로 불었으면 좋겠다 이채민(1958~) 고통에 빠진 지구에도 봄은 왔다. 꽃들이 왔다. 꽃은 머뭇거리지 마라. 꽃은 아가와 가난한 골목과 외로움과 멀고 먼 유랑(流浪) 위에 피어라. 꽃은 꽃잎으로 내려앉아라. 모든 생명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아픈 이들의 병상에도 꽃잎은 내려앉아라. 사람들의 고독한 마음의 창(窓)을 향해 꽃잎은 휘날려 가라. 꽃은 이..
닷새째 추위 지나 오늘은 날이 따뜻합니다하늘이 낯을 씻은 듯 파랗고나뭇잎이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소풍 나오려 합니다긴 소매 아우터를 빨아놓고 흰 티를 갈아입어 봅니다거울을 닦아야 지은 죄가 잘 보일까요?새 노래를 공으로 듣는 것도 죄라면 죄겠지요외롭다고 더러 백지에 써보았던 시간들이 쌓여돌무더기 위에 새똥이 마르고 있네요저리 깨끗한 새똥이라면 봉지에 싸 당신께 보내고 싶은 마음 굴뚝입니다적막을 끓여 솥밥을 지으면 숟가락에 봄 향내가 묻겠습니다조혼의 나무들이 아이들을 거느리고 소풍 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오늘은 씀바귀나물의 식구가 늘어났습니다내 아무리 몸을 씻고 손을 닦아도 나무의 식사에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밤이 되니 쌀알을 뿌린 듯 하늘이 희게 빛납니다아마도 당신이 보내주신 것이겠지요잘 닦아 때 묻..
하루 식전엔 누가 대문 밖을 서성거리기에 문 빼꼼 열고 봤더니 그 눈치 없는 것, 봉두난발에 흙발로 샐쭉 깡통 내밀데요 언제 동네를 한바퀴 돌았는지 흰쌀에 노랑 조, 분홍 수수, 자주 팥 없는 것이 없는데 그냥 보내기 뭣해서 보리 싹 한줌 얹어주었지요 고것이 인사도 없이 뒤꿈치를 튀기며 가는데 멀어질수록 들판은 무거워지고 하늘은 둥둥 가벼워지고 먼 개울가에선 버들강아지 눈 틔우는 소리 들려왔어요 참 염치도 없지, 몽당숟갈 하나 들고 따라가고 싶더라니까요이정훈(1967~) 이 시에서는 구걸을 하러 온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의 추레한 행색보다는 그가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얻어온 것들에 시선이 쏠리는 이유는 뭘까. 흰쌀과 조와 수수와 팥 그리고 보리 싹 한 줌에 눈길이 먼저 가는 것은 아마도 파종을 하는 봄이 ..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쥐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시장 지게체 아이가 숙부님 말로는 학교에 간 동생들을 기다리며 집안 살림 틈틈이 펜글씨 독본을 연습했다고 한다 글씨체를 물려주고 싶으셨던지 어린 손을 쥐고 자꾸만 삐뚤어지는 글씨에 가만히 호흡을 실어주던 손 손바닥의 못이 따끔거려서 일찌감치 악필을 선언하고 말았지만 일당벌이 지게를 지시던 당신처럼 나도 펜을 쥐고 일용할 양식을 찾는다 모이를 쪼는 비둘기 부리처럼 펜 끝을 콕콕거린다 비록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획을 함께 ..
아직 제가 태어나지 않은 것 같은 표정으로몸이 생겼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눈으로유모차에 앉아 있던 아기가 내 눈과 마주친다, 순간아기가 다칠 것 같다내 눈빛에서 튀어나가는 이빨과 발톱을어떻게 눈알에 붙들어 매야 하나 난감하다 자신을 방어할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아기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끊임없이 뭔가를 방어하고 있던 내 두려움도아기 앞에서 다 들켜버린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관절이 연약해지며내 안에서 조용히 무릎 꿇는 것이 있다혀에 가득한 말들은 발음을 잃고표정은 얼굴로 가서 입 벌리고 멍해진다 김기택(1957~) 유모차에 앉아 있는 아기와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시인은 덜컥 겁이 난다. 자신의 눈빛에는 이빨과 발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눈빛에는 거칠고 사납고 치려는 기세가 있기 때문에. 아기..
뒷집 마당에검은 구덩이 새로 패였다 줄을 서서 배웅하던 나무들말을 잃고 묵묵히 젖은 산그늘을 끌어 덮었다 담벼락에 나란히 기댄 의자들도햇볕에 졸던 한쪽 귀를 벌써 어둠에 묻었다 굴뚝에서 거먼 길이흘러나올 때다리를 저는 그림자가 잠깐 다녀간 듯 우물가에 체인이 벗겨진 자전거,녹슬어서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애쓴 거라고눈두덩이 부은 저녁이길가에 한참 서 있다가 들어갔다. 염창권(1960~) 낮과 밤의 하루를 우리는 산다. 낮의 시간에 밤은 시작되고, 밤의 시간에 낮은 시작된다. 이 시는 낮의 시간이 밤의 시간으로 옮겨가는 풍경을 보여준다. 쓸쓸한 풍경이지만 애상(哀傷)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검은 구덩이가 하나 새로 생겨난 것으로 보아 하루 동안 상처받은 일이 있었고, 또 고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무와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