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러니까 알았다울지 마, 울지 마내가 너를 지켜줄게너의 목마가 되어줄게너의 눈이 되어줄게 너의 꿈 나의 별나의 아픔 너의 절망나도 너를 따라가는하얀 파도란다작은 물결이란다다시 오는 파도란다 파도야 파도야 고형렬(1954~) 바다에 이는 물결은 연속적으로 해안으로 밀려온다. 잠잠하게 혹은 맹렬한 기세로 와서 무너진다. 이 거듭되는 파도의 밀어닥침은 어떤 반복되는 질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파도는 제방으로 모래해변으로 달려와 하얀 포말을 뿌린다.시인은 파도 뒤에 파도가 따라오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파도와 연이어 오는 파도를 ‘너’와 ‘나’의 관계로 이해한다. 너와 나는 각각이 하얀 파도이며 작은 물결이며 서로를 따라가는 파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너의 꿈은 나의 별이 되고, 내가 아프면 너..
언제 어디서굴러왔는지도 모를 화분에하얀 날개 같은 꽃이 피었다 볼품없는 잎을 달고 제구실도 못 하던 싸구려 그 화분엔물도 잘 주지 않았다예쁜 꽃을 피우는 화분들에게 정성 들여 물을 주다가남은 물 선심 쓰듯 조금 끼얹어 줄 뿐이었다그런데 그 화분 잎 끝마다 뽀오얀 속살을 내밀더니천사 날개 같은 꽃을 피웠다자꾸 시선이 간다 그러다가 스치는 무엇 무심해져야꽃도 꽃잎 무심하게 지우고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것을 꽃 하나 피웠다고호들갑 떨지 말아야겠다 이순희(1961~) 값싸고 품질이 나쁜 물건 같은 화분이 하나 있다. 거저 준다고 해도 마다할 것 같은 화분이 하나 있다. 남은 물을 내던지듯이 뿌릴 뿐이었던 화분에 어느 날 꽃이 와서 피었다. 꽃잎을 천사의 날개처럼 펼쳤다. 시선과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그 화분에는 ..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번개처럼금이 간 너의 얼굴은 김수영(1921~1968) 삶의 시간에는 어둠의 시간과 불빛의 시간이 함께 있다. 삶은 어둠의 시간에서 불빛의 시간으로, 불빛의 시간에서 어둠의 시간으로 이동한다. 계절이 옮겨가며 바뀌듯이. 이별과 만남이 교차하듯이.사랑의 시간에도 한결같지 않은 감정과 파도처럼 일어나는 불만과 곧 꺼질 듯한 아슬아슬한 신뢰가 함께 있다. 그래서 사랑은 늘 불안한 얼굴이요, 번개가 치듯이 잠깐 빠르게 번쩍이다 사라지는 얼굴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이 곧 사랑의 변주곡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김수영 시인은 자신의 시의 신앙이 ‘자..
나는 불어젖혔어, 사랑을, 색소폰처럼 불어젖혔지, 불멸의색소폰을 온몸의 뼈다귀들이 필라멘트처럼 빛을 낼 때까지 불어젖혔어당신을 불다 불다 내 머리통까지불어 날렸어 사랑은 방사성폐기 물질 반감기가 오기까지45억 년이걸리지 김언희(1953~) 우리의 행위는 사랑을 연주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역의 색소폰을 연주하듯이. 숨을 잔뜩 불어넣으며, 그래서 온몸이 필라멘트처럼 백열하면서 사랑의 음(音)을 연주한다. 입김을 내어 바람을 일으키느라 불고 불어서 머리조차 날아갈 정도로 열렬하게 우리는 사랑을 한다. 그러나 사랑은 언젠가 위기를 맞고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고, 우리가 함께 주고받았던 사랑이 방사성 폐기 물질을 내뿜는 일과도 같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처럼 맹렬했기에 이 치명적인 ..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구상(1919~2004) 구상 시인은 2004년 5월11일에 작고했다. 한국전쟁의 체험을 다룬 연작시 ‘초토의 시’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화가 이중섭과는 친분이 두터웠는데, 이중섭은 청빈한 구도자였던 구상 시인의 인품을 높이 사서 자신보다 연하(年下)이지만 구상 시인을 ‘형’으로 불렀다.구상 시인은 한 문예지에서 기..
찰흙으로 거위를 만들었다꺼욱 꺼욱,목청 좋게 울라고목을 더 길게 만들었다 흙이 마른 다음주둥이와 다리와 물갈퀴에는 노란 물감을 칠하고몸통과 날개는 흰 물감을 입혀연못가에 세워 놓았다 이튿날 새벽, 요란하게거위 우는 소릴 들려나가 보니찰흙 거위는 벌써 온데간데없었다 연못에 사는 거위들이같이 놀자고 데려간 것 같았다 송찬호(1959~) 시인은 찰흙으로 목청 좋게 우는 거위를 빚는다. 찰흙으로 생명을 빚는다. 노란 물감과 흰 물감을 칠해서 거위들이 사는 연못가에 놓아둔다. 밤이 지나고 연못가에 나가보니 놓아둔 찰흙 거위가 사라졌다. 연못에 살던 거위들이 같이 놀자고 데려갔기에. 연못에서 놀고 있을 찰흙 거위를 상상해보자.내일은 어린이날이다. 송찬호 시인의 동시에는 어린이의 재미있고, 신기하고, 엉뚱하고, 발랄..
어머니 돌아가시면 가슴속에또 다른 어머니가 태어납니다 상가에 와서 어떤 시인이위로해주고 간 말이다 어머니, 어머니, 살아계실 때잘해드리지 못해 죄송해요부디 제 마음속에 다시 태어나어리신 어머니로 자라주세요 저와 함께 웃고 얘기하고먼 나라 여행도 다니고 그래 주세요 나태주(1945~) 나태주 시인의 또 다른 시 ‘유월’도 어머니를 회고해서 쓴 시이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하얀 웃음/ 찔레꽃”이라고 쓴 짧은 시이다. 슬프고 아름다운 시이다.시 ‘어리신 어머니’는 작고하신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무너지지만 어머니와의 영이별은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어머니는 자녀의 가슴속에 영원히 사신다. 돌아가셔도 사랑과 기억의 힘으로 다시 “또 다른 어머니”가 되어 자녀의 마음속에 사신다.요즘 나태주 시인은 움직이면..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길이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백양(白楊)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저녁노을처럼 산(山)을 둘러 퍼질 것을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김상옥(1920~2004) 시조시인 초정(艸丁) 김상옥은 1920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약관의 나이인 1939년에 가람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이 시조는 제목 그대로 고향을 떠올려 생각한다. 눈을 가만하게 감았다 뜨는 동안에 고향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휘어서 구부러진 굽이를 돌던 풀밭길이며 맑은 개울이며 은빛 잎사귀의 백양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