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病床)의 아침, 창밖에 눈발이 날립니다 병상에 누워 바라보는 바깥세상 한순간, 첫눈이구나 첫눈이구나 마음은 설레이고 육신의 고통은 사라져 창밖에 날리는 눈송이를 따라 나는 춤추는 인형스스로 창턱에 올라서서 눈에 보이는 세상 이 계절의 풍경 앞에 희열의 눈물이 흐릅니다 아 아직 내가 살아있구나. 박이도(1938~) 병석에 누워 지내던 시인은 창 바깥에 흰 눈발이 흩날리는 것을 본다. 겨울 들어 처음 내리는, 잘고 가늘게 내리는 눈을 본다. 그 순간 공중에서 춤추는 눈송이처럼 마음이 들떠 두근거리고 흥이 일어난다. 그러고는 아파서 병상에 있지만 살아있는 이 순간이 고맙고 기뻐 눈물을 흘린다.어제 수선화가 겨울의 두꺼운 땅을 뚫고 뾰족하게 화살촉처럼 솟는 것을 보았다. 꽃나무가 꽃망울을 맺은 것을 보았다..
하늘가에 붉은빛 말없이 퍼지고물결이 자개처럼 반짝이는 날저녁해 보내는 이도 없이초라히 바다를 넘어갑니다 어슷어슷하면서도그림자조차 뵈이지 않는 어둠이부르는 이 없이 찾아와선아득한 섬을 싸고돕니다 주검같이 말없는 바다에는지금도 물살이 웃음처럼 남실거리는 흔적이 뵈입니다그 언제 해가 넘어갔는지 그도 모른 체하고 ─ 무심히 살고 또 지내는해 ─ 바다 ─ 섬 ─ 하고 나는 부르짖으면서내 몸도 거기에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신석정(1907~1974) 이 시는 신석정 시인의 등단작으로 1931년 ‘시문학’ 10월호에 실렸다. 하늘에는 노을빛이 넓적하게 번지고, 바다의 물결은 금조개의 껍데기 조각처럼 반짝인다. 저무는 해는 바다를 넘어가고, 어둠은 섬을 둘러서 감싼다. 바다에는 자개처럼 빛나던 물살의 흔적이, 웃음처럼 남..
꽃이 시드는 동안 밥만 먹었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꽃이 시드는 동안 돈만 벌었어요 번 돈을 가지고 은행으로 가서 그치지 않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오늘의 사랑을 내일의 사랑으로 미루었어요 꽃이 시든 까닭을 문책하지는 마세요 이제 뼈만 남은 꽃이 곧 돌아가시겠지요 꽃이 돌아가시고 겨우내 내가 우는 동안 기다리지 않아도 당신만은 부디 봄이 되어주세요 정호승(1950~)문학평론가 이숭원은 정호승 시인의 시에 대해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이 주제의 울타리를 고집스럽게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이 시에서의 ‘꽃’은 한 명의 사람(어머니) 혹은 생명일 수도 있고, 사랑의 의지일 수도 있고,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일 수도..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발톱을 깎아주리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부은 발등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리 갈퀴처럼 거칠어진 발톱을 알뜰, 살뜰하게 깎다가 뜨락에 내리는 햇살에 잠시 잠깐 눈을 주리 발톱을 깎는 동안 말은 아끼리 눈 들어 그대 이마의 그늘을 그윽하게 바라다보리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근심을 깎아주리 이재무(1958~)햇살이 환하게 밝은 날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발톱을 깎아주겠다고 시인은 말한다. 고단한 일로 부은 발등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겠다고 말한다. 발톱을 깎다가 사랑하는 이의 이마 그늘도 가만히 바라보겠노라고 말한다.이 시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발톱과 발등과 이마를 바라보던 눈길이 멀리 “뜨락에 내리는 햇살”로 옮겨가는 데에도 있다. 발톱 깎는 소리만 들릴 법한 고요하고 ..
갈대밭갈대들이 차례로 엎드린다바람이 지나가는 중이다 바람도 생각이 있어여기를 가고 있다 거대한 생각의 몸이수많은 말들을 쏟아 놓으며시원스런 걸음으로 지나간다 갈대들은엎드려 그 말들을받아 적고 있다 문효치(1943~)갈대밭에 바람이 지나간다. 갈대들이 몸을 매우 굽히고, 몸을 바닥에 댄다. 바람은 생각을 하면서 갈대밭을 지나가고, 갈대들은 엎드린 채 바람의 생각을 적고 있다. 이 시에서처럼 누군가를 혹은 어떤 대상을 “거대한 생각의 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누군가에게 혹은 그 대상에게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태도를 갖게 된다. 그이를 여러 가능성과 다양성을 지닌 활물(活物)로 보게 된다. “거대한 생각의 몸”이므로 “수많은 말”을 하기도 하지만, 자연(존재)의 보법(步法)은 시원시원하고 큼직큼직하고 당당하다..
민정아 하셨다.네 하였다.보리다 하셨다.네 하였다.고양이다 하셨다.네 하였다. 어쩔 수 없는 건어쩔 수 없는 거다.겪은 것들을 좀 생각해라. 시간 나면 여 와서며칠 있다 가거라.아무 생각 안 나는 시간이필요하다. 즐거운 일을 네가 다 한다.숨 쉬어가면서.뭐 드러 급하게 하냐.한 박자 늦춰가면서. 봄이니까.꽃피잖아.바람도 불고.새도 울어. 김민정(1976~)‘곡두’의 뜻은 환영(幻影)과 같다. 실제로는 없는 사람이나 물건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곡두인생’이라는 말도 있으니 영속되지 않는 허망한 삶을 그렇게 일렀다. 모든 작위(作爲)가 있는 것은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이슬과도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곡두이므로, 그런 연유로 우리의 사랑은 보다 깊어지고, 애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