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다녀왔다. 로마, 폼페이, 나폴리, 피렌체, 피사, 밀라노, 베네치아 등을 짧은 시간에 달리기하듯 바삐 구경한 여행이었다. 수박 겉핥기였지만, 2000년 전 로마의 영광과 15세기 르네상스, 근세 대형 상가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은 제쳐 놓더라도 어느 하나 그 규모와 역사가 뿜어내는 멋만으로도 입을 벌리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여러 도시 가운데 단연코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운 곳은 폼페이였다. 기원전 89년부터 로마에 편입된 이곳은 그리스 쪽에서 넘어온 헬레니즘 문화의 기반 위에 로마의 황금기 문화를 얹은 도시다. 흔히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라고 부르는 폼페이는 서기 79년 8월에 근처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 때문에 화산재로 뒤덮여 사라졌다. 그러다 16세기에 수로 공사 도중 유적이 발견되어..
휴대전화 번호가 일제히 자동으로 바뀐 후에도 내 번호의 첫 세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다. 이유는 2G라서. 아직도 2G인가를 힐난하는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2G와 4G시스템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바뀌지 않은 번호가 고맙기만 하다. 아직도 종이신문을 들고 화장실로 가 아침을 시작하는 낡은 습관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일상의 한 부분이 나를 그런대로 지탱해 줄 것 같은 착각에서이다. 착각은 곧바로 시대착오적인 생각과 행동을 낳는다. 어쩌다 모인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떠벌리는 잘난 척마저 이야기의 진위를 확인하려 꺼내든 스마트폰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다. 세상이 정말 달라진 걸 안 것은 올해 초 전시를 하고 나서부터이다. 전시장에 들어온 관람객들 손에는 여지없이 스마트폰과 카메라가 들려..
한 해를 뒤돌아볼 때면 거울 폴더를 펼치는 것 같다. 인정머리 없이 벌거숭이 날들이 딱 그만큼만 들어 있다. 부스러기 며칠 동안 술잔에 부어도 부풀기는커녕 미화도 산화도 되지 않는다. 더 쨍하게 말라붙어서는 내게 겨눈 칼끝이 된다. 올해는 유달리 지방을 다녀온 기억들이 반들거린다. 대부분 12월 말 DMZ프로젝트 작업을 위한 사전 답사와 보도연맹에 관한 작업 때문에 시작했던 발걸음이었다. 그중에서도 공주를 향해 가던 길,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거절이 아직도 귀에 멍하니 박혀 있다. “보도연맹? 왜! 왜!, 왜 물어! 알아도 몰라!” 그리고 지난 6일 함평 양민학살 합동 위령제에 갔을 때 대한민국의 고독이란 말이 떠올랐다. 너무 붉어 더 추웠던 노을을 등지고 돌아올 때였다. 그 말은 철원 퍼포먼스 장소를 ..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김수영의 시 ‘봄밤’의 한 대목이다. 예전부터 “종이 들리고”가 좀 미심쩍었다. 종을 쳐서 현재 시각을 알리는 것은 서양 쪽 풍경이 아니던가. 최근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1912)를 읽다가 다음 구절에 새삼 눈길이 멈췄다.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황현산 역) 어느 봄밤 김수영의 귀에는 ‘미라보 다리’의 ‘종소리’가 들렸던 것일까. 여하튼 김수영은 서둘지 말자 했지만 지금은 봄밤이 아니라 겨울밤이어서 나는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1. 봄밤이 아니라 겨울밤이어서, 2013년의 12월이어서, 나는 김수영처럼 자신을 다독일 수가 없다. 작..
글쟁이에게 가장 곤란한 순간은 지면과 소재, 둘 중 하나라도 없을 때다. 반대로 말하자면 지면과 소재가 맞아떨어질 때처럼 기쁜 일도 없다. 지금 나는 한 장의 앨범을 듣고 있다. 이 지면을 기꺼이 그 앨범을 위해 할애하려고 한다. 들국화의 새 앨범이 나왔다. 시장에는 6일 풀리지만 운 좋게 조금 빨리 앨범을 듣게 되었다. 1986년에 나온 2집 이후 최성원, 고 주찬권이 함께한 17년 만의 앨범이다(1995년에 들국화 3집이 나오긴 했지만 그 앨범은 사실상 전인권의 솔로 앨범이었다). 앨범 커버는 단출하다. 길가에 핀 흰 들국화 사진이 전부다. 실로 오랜만의 귀환치고는 너무도 담담하다. 다섯 곡의 신곡, 그리고 김민기와 조동진의 리메이크 곡, 두 곡의 팝송 리메이크가 첫 번째 CD를 채운다. 들국화 1,..
몇 주 전 오랜만에 대형 할인매장에 들렀다. 아파트 바로 앞에 꽤 규모가 큰 재래시장이 있는 터라 굳이 장을 보러 그곳까지 갈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아이들과 함께 용산으로 향해야만 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아이들이 원하는 장난감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말 오후의 매장은 가족 단위의 쇼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카트를 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문득 무엇이 이들을 이곳으로 이끄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표면적으로 쇼핑의 효율성과 편리성을 내세울 수 있겠지만, 이 공간이 제공하는 독특한 경험 패턴도 한몫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지하다시피 대형 할인매장은 꽤나 독특한 공간 질서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상품들이 명료한 분류 체계에 따라 진열대 위에 배치되어 있고, 쇼핑객은 카트를 밀며 진열대 ..
여가 활동으로 무얼 즐기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글을 쓴다고 답했었다. 그런데 이게 좀 어처구니없는 답변이다. 애송이일지라도 명색이 ‘작가’라는 작자가 취미로 글쓰기를 즐긴다니. 어쨌거나 글자판 위에 손가락을 얹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곧 탐색과 상상으로 머리가 요동친다. 다만 차이는 있다. 어떤 계획이나 납기를 갖고 쓰는 글과 의무 없이 자유롭게 쓰는 글은 긴장의 정도가 하늘과 땅 차이다. 두 종류의 글쓰기에서 모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몰입을 맛볼 때가 있지만, 아무래도 앞뒤 없는 엉터리 상상과 논리의 비약은 취미 생활처럼 끼적일 때 더 자주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 이런 끼적 글이 정식 글의 밑감 노릇을 할 때가 늘어나 결국은 업무와 여가 생활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일 중독일 공산이 크다. 그..
한국의 현대미술에 새집이 생겼습니다. 작은 섬들을 이루며 경복궁 옆에 나지막하니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웃집처럼 접근도 쉬워졌습니다. 접근성이 좋아진 점은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술관이 과천에 있을 적에는 외국인 관광객뿐만 아니라 국민에게도 약간 숨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숲속의 요새 같았던 동물원 옆 미술관은 코끼리 열차도 타야 했고 가기가 참 복잡했는데 벌써 추억거리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벙커를 닮은 기지답게 근현대미술자료 수집 및 연구와 관련 전시로 명맥을 이어간다고 합니다. 긴 세월 작품들을 더 잘 보호하고 빛나게 해줄 것 같아 반갑습니다. 그렇다면 새로 생긴 서울관은 동시대 미술관으로서 좀 더 역동적이 될 수도 있겠구나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