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잘 지내고 계신지요. 벌써 가물가물합니다. 우리가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이 올해 초였던가요. 대선이 치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무척 추운 날이었다고 기억합니다. 7~8년 만에 만난 것이었지요. 우리가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것이 1995년이었으니 형과 알고 지낸 것도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학부 시절 내내 우리는 거의 매일 붙어 있다시피 했었지요. 돌이켜 보면, 일사불란함과는 거리가 먼, 들끓는 도가니 같은 모임이었습니다. 노래패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1990년대 중반이었으니까요. 형은 특유의 온화함으로 동아리를 조용히 보살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제가 여러 지면에 드문드문 발표..
아이유에 이어 무한도전까지, 지금 대중음악계는 표절 논란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아이유의 ‘분홍신’에 이어 박명수와 프라이머리의 ‘아이 갓 씨’가 외국곡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려 우선 밝히자면 ‘분홍신’은 분명히 표절이 아니다. ‘아이 갓 씨’는 일단 표절 대상곡의 원작자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상황이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가요계에 심심하면 터지는 게 표절 논란이다. 예전에는 표절이 확실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최근에는 억지성 표절 제기가 많아지는 추세다. 몇 년 사이 한국 대중음악이 내수용에서 수출용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에 창작자들을 포함한 관계자들은 스스로에게 엄격해졌다. 또한 그사이에 작곡가들이 대거 세대교체 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표절 제기는 끊이지 않는다. 아니, 오..
하늘 푸른 만큼 가을이 깊다. 전남 장흥의 한 농가. 여럿이 툇마루에 앉아 밥을 먹고 있다. 품앗이로 가을걷이에 한창인 귀농인들의 점심이다. 낯선 방문. 초면에 머쓱하기도 하련만 체면 불고하고 수저를 놓은 자리에 끼어들어 한술 뜨려는데 파리 떼가 먼저 달려든다. 찬은 김치와 두부와 깻잎장아찌가 전부다. 늦은 점심이라 시장하기도 했지만 한손으로 파리를 쫓으며 넘기는 밥이 꿀맛이다. 소쿠리에 내온 고구마에 김치를 얹어 먹는 후식도 기가 막히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나서야 서로 알은체한다. 아무렴 밥이 먼저지. 비로소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 젊은 부부가 있다. 아내는 스물 후반, 남편은 서른을 겨우 넘긴 부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의 그들이 농사를 택한 게 의아하기도 하고 신..
지난 주말 양일간 당인리발전소 인근 카페에서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북페어 행사가 열렸다. 젊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자신이 제작한 책과 잡지, 음반을 직접 들고 나와 전시·판매하는 이 행사는 홍대 앞 서점 ‘유어마인드’가 해마다 주최하는 것으로,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았다. 100여개 팀이 참여한 가운데, 꾸준히 청년 세대의 문화적 관심사를 담고 있는 ‘도미노’나 ‘월간 잉여’ 같은 독립 잡지가 눈에 띄었고, 건축, 패션, 영화 등 특정 분야의 전문성에 바탕을 둔 비정기 잡지나, 특색 있는 출판물도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취향의 향방은 제각각이었지만, 전시된 책들이 공들여 만들어진 것만큼은 분명했다. 돌이켜보면, ‘홍대 앞 청년문화’의 주요한 지류로 성장한 이 행사가 2009년에 시작되었다는 점..
볼썽사나운 짓을 하는 사람을 비웃을 때 쓰는 말이 있다. “병신도 급수가 있다더니, 꼴값을 떨어요.” 얄궂다. 나는 눈 병신, 시각장애인이다. 급수가 있다. 나는 1급이다. 1급이 가장 눈이 나쁜 사람이고 그로부터 6급까지 등급이 있다. 1999년에 처음 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시각 장애 5급으로 비교적 장애 정도가 가벼웠지만, 2005년에 1급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1급 판정을 받고 병원을 나서면서 두 가지 야릇한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 ‘흠, 이런 정도라면 정말 언젠가는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수 있겠네.’ 걱정이었다. ‘그런데 등급이 올랐으니 혜택도 늘어나겠는걸.’ 무슨 어려운 자격증을 딴 사람처럼 으쓱했다. 5급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나는 지하철을 공짜로 탔고, 국내선 여객기와 철도도 ..
나에게는 거꾸로 가는 작업시계가 있다. 이 시계는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들이나 사람들, 혹은 장소 때문에 거꾸로 간다. 요즘 1970년대의 엄혹했던 유신 시절도 아닌데 감시와 색출, 또다시 새마을 깃발을 휘날리며 뒷걸음질치는 시계와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사라지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거꾸로 가는 시계다. 갈수록 기억력이 나빠지자 정신차려 더 배우라고 재촉하는 시계가 끊임없이 ‘왜, 왜, 왜’ 되물으며 째깍거리니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원인을 묻는다. 내 눈앞에 모든 것이 점차 복잡해져만 가기 때문이다. ‘복잡해진다’는 것은 뭔가가 많아졌다는 것보다 어느새 사라졌다고 느낄 때다. 다시 말하자면 사라진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느낄 줄 모르는 무감각한 상태가 나를 복잡하게 만..
옴니버스 영화 시사회에 다녀와서 이 글을 쓴다. 지금부터 나는 내게 주어진 지면을 이 영화를 홍보하는 데 다 투자하려고 한다. 이 홍보가 용서받으려면 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프로젝트 영화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편이냐 하면, 나는 인권위 운운하는 설명들을 다 지워버렸으면 싶다. 바로 그 설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지 않기로 결정하게 될까 싶어서다. ‘옳은’ 영화니까 의무적으로 보자는 게 아니라, ‘좋은’ 영화니까 안 보면 손해라는 얘기다. 세 개의 단편을 희미하게만 소개하자. 박정범 감독의 는 장애가 있는 소년 ‘두한’과 그의 친구 ‘철웅’의 이야기다. 두한의 말은 어눌해서 알아듣기 힘들고 동작도 굼떠서 동전치기에 백전백패다. 철웅은, 두한의 말을 유..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지난 20년을 돌아볼 때가 있다. 확실히 재밌는 시절이었다. 대중문화의 황금기였던 90년대에 20대의 대부분을 보낸 것도 행운이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죽던 날, 등장인물의 갈등이 클라이막스로 향하는 닉 혼비의 소설 처럼 사회적, 문화적으로 굵직한 일들이 빵빵 터질 때마다 실시간으로 그 감흥들을 느꼈기에 많은 순간들을 또렷이 기억할 수밖에 없다. 단, 흐릿한 시간들이 있다. 군생활을 했던 26개월이 그렇다. 후방에서 있었기에 몸이 고될 만큼의 훈련은 없었다. 그러나 26개월 내내 나를 괴롭혔던 건 상하관계였다. ‘짬’이 달릴 때 악질 선임들에게 당했던 구타와 갈굼은 적어도 그 전의 나에게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폭력의 나날이었다. 상병을 거쳐 병장을 단 후 이제야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