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는 베이비부머이자 하우스푸어이며 은퇴한 직장인이자 영세 자영업자이다. 한때 중산층이었던 그는 지금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을 운영 중이다. 개업 후 한동안 무탈하게 지내던 그에게도 최근 무한경쟁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변두리에 속하는 상권에 규모가 큰 카페들이 속속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건물주는 다음 계약 시 임대료를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K씨는 대책 없이 근심만을 거듭하다가, 아르바이트생 P군이 커피전문점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서둘러 현실로 되돌아왔다. 지방 출신의 P군을 볼 때마다 자식 가진 부모로서 묘한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K씨는 대졸자와 고졸자 간의 임금 차이가 크다며 내 자식만큼은 반드시 대학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넘쳐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 역시 ..
오늘은 ‘큐브’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큐브는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을 준비하는 청춘을 위한 방들의 군락지로 출발했습니다. 고도성장의 시기, 많은 젊은이들이 서울에 올라와 하숙방, 벌집, 고시원, 원룸 등과 같은 큐브의 ‘방’들을 전전하면서 학교나 직장에 다니면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지요. 그들 대부분은 인생의 중간 목표로 ‘결혼’과 ‘내 집 마련’을 설정하곤 했습니다. 큐브와 그 거주자들의 삶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온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였습니다. 분양가 상한제 폐지와 부동산 폭등세로 인해 사실상 ‘내 집 마련’의 꿈이 물거품이 되었지요. 그 이후 큐브는 실제로 방에서 방으로의 이동만을 허용하는 폐쇄계, 그러니까 환승역이 존재하지 않는 순환선의 세계로 변모했습니다. 이 과정에..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확한 길이기는 하지만, 쉽고 빠른 길은 아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해야 한다. 그 어렵고 느린 길을 걸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은 그 대신 권력을 가지려 한다. 권력을 얻어 명령의 주체가 되면 커뮤니케이션을 생략해도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행기나 호텔에서 여성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 권력자들은 사랑 대신 지배를 선택했고, 그런 의미에서 실패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넓게 보면 교환의 문제이기도 하다. 26세의 카를 마르크스는 훗날 (1844)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노트에서, 돈이 인간관계를 비틀어놓지 않은 상태를 가정해 보라고, 그때의 교환은 어떨지를 생각해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나마나 한 인사, 뻘쭘한 가운데 이름을 말하고 나면 남자이름이네, 토를 단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미술을 한다고 밝히면 장르를 물어보고 설치미술을 한다고 대답하면 그때부턴 서로 먼 산 바라보기다. 요즘은 좀 다르다. 낸시 랭 같은 거 하느냐고 묻는다. 예전엔 신정아를 만나본 적이 있느냐고 주로 물었다. 갤러리가 탈세의 온상처럼 보도되는 시절에는 ‘행복한 눈물’ 같은 거 그려서 돈 좀 벌지,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런 뒤 대개가 어쨌건 상대를 ‘여류화가’로 입력하고 나면 팜므파탈이려니, 자기가 어떻게 생겨먹었든 ‘나홀로 자유’ 영화를 찍어대고 만만치 않을 경우는 입방아로 소설을 쓴다. 그 화가가 스모키 눈화장까지 했다면 그들의 소설은 다큐로 둔갑해 있다...
석사논문을 쓸 때 처음 를 읽었다. 한 사나흘 걸렸던가. 읽어치웠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곱씹고 음미할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십년 만에 다시, 역시 어떤 필요 때문에 를 뒤적이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예컨대 ‘계씨(季氏)’편에서 만난 이런 구절은 나를 멈춰 세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상급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며, 곤란을 겪고 나서야 배우는 사람이 또 그 다음이다. 곤란을 겪고 나서도 배우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바로 그러한데, 이는 하급이다.” 요컨대 네 종류의 인간형이 있다는 얘기다. 첫 번째,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물론 공자님 말씀에서 이 앎의 대상은 ‘도(道)’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언행이 모두 도에 부합한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할 수는 없..
임민욱 | 설치미술가 북한의 전쟁 위협이 무색하게 관객들로 꽉 찬 아르코 대극장에서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극 를 보았다. 국제다원예술페스티벌 ‘봄’은 실험극의 거장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을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다. 내가 처음 접했던 카스텔루치의 은 설치미술 콜라주처럼 보았는데, 이번 작품의 구성은 꽤 단순했다. 아버지가 똥을 싸고 아들이 씻겨주는 데 거의 45분을 할애했으니까. 무대 위로 부축받으며 등장한 늙은 아버지는 앉은 채로 선 채로, 끊임없이 똥을 ‘비워냈다’. ‘미안하다’를 연발하며 울부짖었다. 아들은 하얀 소파에서 의자로, 의자에서 하얀 침대로, 끊임없이 배설하는 아버지를 괜찮다고 달래며 정성스레 기저귀를 갈고 몸을 씻겨주며 바닥을 닦았다. 아버지의 침대와 기저귀는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