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회경험’이라는 말을 쓴다. 사회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사회경험을 통해 ‘인생이란 말이야’ 혹은 ‘세상은 말이지’ 하며 그럴듯하게 말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게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삶일지는 몰라도 개인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전부는 아니다. 사회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정치적 부조리, 경제적 불평등에 더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사회에 대한 불안이 원인이라고 말하면 틀리지 않는 대답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스트레스는 살면서 겪어야 하는 경험의 전부를 사회에서 얻는 사람들(바로 ‘사회란 말이지’ 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우리들 말이다)이 만들어낸 피곤함이 아닐까? 우리는 상상과 현실을 분리시키..
10월9일 한글날이 23년 만에 공휴일로 돌아왔다. 올해부터 쉬는데,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다. 국어 단체가 앞장서기는 했지만 학부모, 시민, 노동 단체들이 모두 힘을 모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회와 국민의 압도적인 호응이 정부를 움직였고, 마침내 2012년 12월24일에 한글날이 공휴일로 확정됐다. 2005년 말에 국경일로 정해진 뒤 7년 만의 일이다. 공무원의 주 40시간 노동 도입에 따라 2008년부터 제헌절이 공휴일에서 빠진 점에 비춰보면 뜻밖이지만, 그만큼 우리 국민이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신호가 아닐까 한다. 쉬는 날이니 푹 쉬자. 집에서만 뒹굴기에 아깝다면 여기저기서 열리는 행사에 가족과 함께 참여하는 것도 좋겠다. 한글날 아침에 광화문에서 출발해 세종대왕께서 태어나신..
여기, 중산층의 삶을 꿈꾸는 젊은 남성 K씨가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가정을 가진 남자의 의무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가장의 의무라니? 지금의 시선으로 보자면 왠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K씨가 외면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족의 시간은 바깥 세계의 시간과 다른 속도로 흐르고 보통 부모의 시계에 맞춰져 있게 마련이니까. 1950년대 중후반생인 K씨의 부모는 그 세대 태반이 그랬듯이 청년기에 고향을 떠나 어렵게 서울에 정착했고, 남이 뭐라고 하든 자신은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다. K씨는 해마다 명절이 돌아오면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가용에 몸을 실은 채 귀성길에 나서야만 했다. 주차장으로 변한 고속도로가 그의 조부모보다 먼저 나..
시절이 답답하게 돌아가니까 애매한 캔버스 밑바탕 칠만 하게 된다. 그럴수록 캔버스는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며 나를 더 자극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얗게 튕기고 있는 표면을 노려보자니 어떤 새로운 원근법을 강제하고 싶은 욕망도 강하게 생겨난다. 가령 목표도 소실점도 없이 서로 연관이 없는 기억들을 덧대다 보면 새로운 별자리가 생겨나겠거니 하는 식으로. 그러나 소망하는 그림과 달리 펼쳐져 있는 현실은 파국적이라 할 만하다. 예컨대 화면의 근경에는 혼외 자식을 둔 의혹을 받아 결국 사의를 표명한 검찰총장이 건물을 나서고 있고 육체관계는 있었으나 교제는 없었다는 희한한 내용을 발표한 대형교회 아들이 모텔 창문에서 얼굴만 삐죽 내밀고 있다. 온 나라가 난데없는 외설로 채워진 광장에는 벌거벗겨진 열 ..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몇 달 뒤 소설가 이청준은 연작소설 ‘언어사회학서설’의 첫 단편 (1973년 봄)을 발표했다. 당시 시대상의 한 본질을 말의 타락이라는 측면에서 성찰한 작품이었다. 그 시대상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하여 말들의 주소를 바꿔 놓음으로써 말들을 혹사했고 말들을 배반했고 결국에는 그 말들이 기진맥진 지쳐나게 했다.” 유신헌법 탓에 ‘유신(維新)’이라는 좋은 말이 주소를 잃어버린 때였다. 40년 전 소설 얘기지만 안타깝게도 주소를 잃고 떠도는 말들은 지금도 많다. 말들이 우리에게 혹은 우리가 말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마녀사냥’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봤다. 남자들이 보기에 밉살스럽다 할 만한 여성 캐릭터를 대중문화 생산물들에서 골라내고 그녀의 ‘죄질’을 신랄하..
그날의 바람과 석양이 기억나는 걸 보니 딱 2년 전이었을 거다. 여름에서 가을로 전환되는 스위치 같은 바람이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던 저녁, 나는 제주 애월에 있었다. 2002년 6집을 끝으로 2005년 제주로 내려간 장필순이 제주시에서 공연을 했다. 운 좋게 그 공연을 봤다. 더욱 운 좋게 뒤풀이 자리에 함께했다. 더더욱 운 좋게 다음날 애월 중산간에 위치한 장필순의 집 근처 펜션에 초대를 받았다. 전날 그녀와 함께 연주했던 이들이 머문 곳이었다. 함춘호, 신석철, 박용준… 아, 말을 고쳐야겠다. 그녀와 함께 연주했던 이들, 말고 하나음악 식구들로. 한동준, 오소영 등이 모두 함께 있었다. 오랜만에 모인 동생들을 보며 연신 흐뭇한 웃음을 짓던 조동익은 물론 빼놓을 수 없다. 다른 분의 초대를 받긴 했으..
얼마 전 온라인상에서 ‘1만m 심해의 인형’이 화제였다.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운영 중인 무인 잠수정에 의해 가라앉아 있는 모습이 발견되었는데, 그 모습이 처량하기도 하고 섬뜩해서 내 상상도 따라 출렁거렸다. 가볍디 가벼운 인형이 어떻게 물에 뜨지 않고 심해에까지 오게 됐을까…. 누리꾼들도 “1만m 심해인형, 처키같다. 불쌍하다. 꺼내주고 싶다” 등등, 다양한 의견과 상상을 풀어놓았다. 그러다 난 갑자기 심해인형이 전두환 일가가 제일 먼저 검찰 면전에 추징금으로 내던진 미술품의 위상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전두환 비자금에 관한 수사가 시작됐을 때, 뉴스 속 미술품들은 마치 수갑이 채워져 얼굴을 가린 채 줄줄이 차량으로 호송되는 범죄자들처럼 보였다. 언론의 미술품 관련기사는 일식당에서 회전 초밥을 각자..
8년 전, 뒤늦게 교수 자리를 얻은 어느 선배가 자신은 영어 강의 능력이 있음에도 운때가 안 맞아 좋은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자기 대학의 학생들 영어 실력이 낮아 나중에 대우받지 못할까 염려해 학과 수업과는 별도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말도 남겼다. 전공이 사회과학임에도. 그 선배는 얼마 전에 서울의 명문대로 자리를 옮겼다. 영어 강의 능력을 인정받은 모양이다. 영어를 익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좋기로야 영어 쓰는 나라에 살면서 그곳 사람들과 부대끼는 길이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그 길을 택하기 어려울 때 국내에서 찾을 수 있는 대체수단도 이제는 꽤 많다. 그래도 예로부터 영어에는 왕도가 없다고들 했듯이 어떤 수단을 택하느냐보다는 얼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