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과거 사실들에 대해 특정한 인간 집단이 공유하는 기억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이나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나 자기 처지와 기준에서 과거를 기억한다. 그러다보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역사’는 자주 ‘전쟁’의 원인이 되곤 한다. 많은 언쟁이 “그때 네가 그랬잖아.”라는 말에 대해 “내가 언제?”라고 대답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평생을 함께 산 부부조차 같은 일을 달리 기억하는 탓에 다투는 일이 흔한데, 서로 살아온 경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기억을 요구하는 것은 본래 무리한 일이다. 소수자가 보는 역사, 지배자가 보는 역사, 여성이 보는 역사, 남성이 보는 역사가 다 같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국사’는 다양한 관점과 태도를 지닌 사람들에게 ‘공통의 기억 요소’들..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파견법 위반으로 볼 수는 없다.” 지난 16일, 고용노동부가 삼성전자서비스와 협력업체들에 대한 근로감독 결과를 발표한 내용의 핵심이다. 한국 사회의 진정한 ‘갑’인 삼성에 논란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면죄부를 주고 만 것이다. 고용노동부가 언급한 ‘논란의 여지’ 내용도 참 고약하다. “A/S(애프터서비스) 업무의 특성상” 균질화된 서비스 제공을 위해 통일된 업무 매뉴얼이 필요하기에, 이러한 매뉴얼을 삼성전자서비스 원청의 구체적인 업무 지시·명령이라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업무의 특성을 핑계로 대면 현대차 불법파견에도 면죄부를 줄 수 있다. “자동차 조립 업무의 특성상” 각 차량에 장착되는 부품 사양과 작업지시서를 통일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기에, 이를 업무 지시·명령으로 볼 수 없다고..
“난 공장이 싫어. 기계가 딱 움직여야지 일하는 거야. 청소하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커피 마시는 것도 애들과 잠시 얘기하는 것도 일에 포함되지 않아. 기계가 움직여야지만 일하는 거야. 너무 삭막해서 싫어.” 18년 전, 친구가 진저리치며 말했다. 초등학교 졸업 뒤 서울에 와 봉제노동자로 14년째 일할 무렵이었다. 몸이 아픈 친구는 시간외노동(잔업)을 빠지면 관리자가 눈치를 줘 어쩔 수 없이 일을 관뒀다. 쉬어 몸이 회복되면 다시 일자리를 찾았다. 작업벨 소리가 싫다던, 이제는 연락 끊긴 친구. 10대에 보조원으로 시작해 20대에 재봉사였던 친구는 어느덧 40대 중반일 텐데 지금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까. 얼마 전 한 50대 중반 여성노동자를 만났다. 3년 전에 만났을 때 휴대전화 배터리를 조립했는..
엄기호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내란음모 사건 때문에 나라가 난리도 아니지만 얼마 전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 탄압을 받던 언론인들이 주축이 돼 독립언론을 표방하며 만든 뉴스타파에서 새 기자를 ‘인턴’으로 뽑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뉴스타파에서는 ‘국민의 알권리와 진실에 헌신하는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사람을 뽑는다면서 ‘소정의 급여’를 제공하고 3개월 후에 채용 여부를 정하겠다고 공고했다. 이에 대해 청년들을 중심으로 뉴스타파에 유감을 표시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대부분 ‘인턴제도’를 도입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초기에는 아직 취업할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직업을 체험해 보며 미래를 설..
현대차 싼타페DM에서 비가 샜다. 테일 게이트 특정 부분 실링 처리가 문제였다. 교통안전공단 자동차결함신고센터에만 지난달까지 290여건, 이달에만 20건이 접수됐다. 이쯤 되면 회사의 빠른 대책이 나올 법한 상황인데 현대차는 어찌된 영문인지 사태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오죽했으면 싼타페를 ‘수(水)타페’라 부르는 지경까지 갔겠는가. 현대차의 대책 발표가 고객을 더 화나게 했다. 차량에 대한 리콜과 사과는커녕 무상 수리기간만 5년으로 연장하고 실리콘으로 문제의 부위만 덮었기 때문이다. 실리콘으로 누수 부위만 덕지덕지 바른 것이 오히려 화를 더 키웠다. 언뜻 봤을 때 사고차량으로 보일 뿐 누수는 전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대차의 시간끌기를 단순한 서비스 차원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 고객과..
1948년 5월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헌법 제정 작업이 시작되자,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은 국호 문제였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가 중심이 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바 있으나 한국민주당은 이를 거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받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임정 요인들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시정부 봉대론도 잦아들었고, 임시정부 주석이던 김구는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해 5·10 총선거에 불참했다. 임시정부 중핵들이 헌법 제정 과정에 불참한 상황에서 국호 문제는 원점에서 논의할 대상이었다. 제헌헌법 초안에서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잠정 결정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이 국호가 부당하다고 지적하는 지식인들의 글이 여러 신문 지면을 채..
무더운 하루,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비슷한 일을 본다. 좋은 차를 가진 힘세 보이는 남자가 일하는 차를 세워둔 여려 보이는 남자를, 부추기는 이들을 옆에 둔 목소리 큰 남자가 혼자인 데다 목소리 작은 남자를 윽박지른다. 사는 건 모욕을 주는 것이라는 듯. 그 앞을 쓱 지나치는 내가 있다. 누군가 대놓고 깔보고 욕되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미 모욕이 일상인 삶을 산다. 경쟁을 강요하고 점수로 평가하는 학교가,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터가, 어느 동네에 사느냐가 신분을 알려주는 주거환경이, 메울 수 없는 빈부 차가, 자본에 경배하는 정치·문화·법 등이 삶을 모욕한 지 오래다. ‘모욕’이라는 말에 빠져 걷다 그만 왼쪽 발목이 삐끗하는데, 순간 마주오던 한 남자가 나보다 먼저 “어이쿠!” 한다. 걸..
“부결이라고요? 에이~ 설마.” “사실이라니까. 평택공장에서만 반대표가 54% 넘게 나왔어요.” 지난 7월18일, 쌍용자동차 노사가 도출한 임금협상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48.4%의 찬성만을 얻어 부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렇다. 이건 이변이었다. 2009년부터 지난 4년 동안 국내 완성차 5개사가 벌인 임단협 교섭에서 잠정합의가 부결되는 일은 2011년 기아차, 2012년 한국GM, 딱 두 차례뿐이었다. 그런데 정부와 사용자단체가 “노사상생의 모범”으로 칭송해 마지않는 쌍용차가 그 세 번째 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현대기아차나 한국GM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장조직들의 부결 운동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소식을 전하는 현장 노동자들의 반응이었다.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