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한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노인요양시설에서 치매 노인들에게 반말을 하고 고함을 지르는 행위를 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이 사건이 불거지고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 학교에서 노동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들이 노인요양시설에 가서 ‘봉사’를 하게 된 이유는 상습적으로 흡연을 하는 등 학교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다. 치매 노인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는 것을 징벌의 수단으로 쓴 것이다. 이들을 위한 노동이 귀찮고, 더럽고, 힘들기 때문에 누구나 ‘기피’하는 일이고 기피하는 일이기에 징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는 노동을 징벌이 아닌 교육의 수단으로 쓴 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어떤 교육적 효과일까? 학교가 생각하는 교육적 효과란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이 ..
3·1운동과 청산리 독립전쟁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차례 순국제현(殉國諸賢)이나 순국제씨(殉國諸氏) 추도회를 열었다. 굳이 번역하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러분’이라는 뜻이다. 일제 침략자들에 맞서 함께 싸우다 먼저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동지이자 친구였지 조상이나 웃어른은 아니었다. 해방 직후 국민의례를 할 때에도 그들은 순국열사(殉國烈士)로 불렸다. 세월이 흘러 그들의 아들 손자뻘 되는 사람들이 성인이 된 뒤에야, 그들은 ‘선열(先烈)’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한국인들이 ‘나라를 지켜주는 영명한 혼령’이라는 뜻의 ‘호국영령(護國英靈)’이라는 말을 처음 접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무렵이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침략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들을 호국영령이라 부르며 ‘조선인’들에게도 그..
실밥과 먼지, 소음이 가득하고. ‘햇빛을 잘 못 보는’ 공장.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름 대신 “1번 시다” “5번 미싱사” 등으로 불렸다. 어리게는 12살부터 시작하는 시다들과 19살부터 시작하는 미싱사들은 하루 14시간을 일을 하고 한 달에 두 번 쉬었다. 그러고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거나 사먹기가 어려웠다. 일하다가 병을 얻으면 치료가 아니라 해고를 당했다. 1960~19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걸 알고는 근로조건을 개선할 수 있겠다 여겼던 한 청년은 갖은 노력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 법은 아무 쓸모가 없음을 깨닫는다. 끝내 근로기준법 책을 껴안고 자신에게 불을 붙였다. 그가 간 11월도 아니건만 어울리지 않게 나는 ‘전태일’을 떠올..
광주민중항쟁 기념일이 되면 민주화 세대들은 자신의 자녀나 학생들에게 광주항쟁의 의미를 전하려고 노력한다. 동영상이나 그때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고 직접 광주 망월동에 데리고 가기도 한다. 그 끔찍한 장면들을 보면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광주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말해주며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많은 경우 후대들의 반응은 신통찮다. 건성건성 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너희가 누리는 이 자유와 민주주의가 누구 덕분인 줄 아느냐?” ‘덕분’을 강조하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부채의식을 갖게 한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빚을 갚아야 한다. 빚을 진 사람은..
‘갑’의 횡포에 맞서 정치권 모두가 “을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 모두 권력만 잡으면 ‘갑’들을 대변해온 터라 진정성에는 의심이 가나,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도 없던 ‘을’들에겐 공간이 열렸다. 수십년 억눌려온 택배기사들이 CJ대한통운의 일방적 수수료 삭감과 페널티 제도에 분노해 파업에 나서는 등, 부당한 ‘갑질’에 맞서 직접 행동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 현상이다. 바로 그 시점에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갑들이 동행했다. 각각 불법파견과 불산 누출로 하청노동자들에게 제대로 ‘갑질’을 하고 계신 현대차 정몽구, 삼성전자 이건희 등 재벌 회장들이 역대 최다로 참여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 8일 한국과 미국 최대의 갑들이 모인 ‘한·미 CEO 라운드..
울고 있는 정 과장의 눈앞에 개인물품을 담을 누런 박스 하나가 놓여 있다. 동료들은 애써 외면하고 직속상관인 유 부장은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자리를 뜬 상태였다. MBC ‘정리해고’ 편에 나온 장면의 일부다. 노동절을 앞둔 시기에 정리해고라는 주제를, 그것도 주말 오락 프로그램에서 다뤘기에 유심히 봤다. 연출자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리해고는 50일 전 당사자에게 통보해야 하고, 해고 회피 노력과 대상자 선정의 객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영상의 긴박한 이유가 있어야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이 프로그램에는 빠져 있다. 그러나 오락 프로그램에서 그것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인 듯하다. 그래서 정리해고의 절차나 과정이 아닌 연출자의 메시지가 더욱 궁금했다. 극중 정준하..
“이웃집 아저씨가 수돗가에서 피 묻은 대나무를 씻고 있었다. 무슨 피냐고 물었더니 웃으며 ‘조선인의 피’라고 대답해 주었다. 맘씨 좋고 친절하던 그 아저씨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어린 시절 간토대지진(1923) 직후의 ‘조선인 학살’을 겪은 한 일본인의 회고담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 경제는 ‘미증유(未曾有)의 호황’을 맞았다. 유럽 열강이 전쟁을 치르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에 일본제 상품이 중국 시장을 석권했다. 이 기간 중 일본인들은 살림살이가 하루하루 나아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시절도 잠시, 전쟁이 끝나자 반동공황이 찾아왔다. 일본 기업들은 설비 투자 과잉 상태에 빠졌고, 노동자들은 해고와 임금 삭감의 고통을 분담해야 했다. ‘고도성장’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그들..
지난주 수요일, 간만에 봄볕이 났다. 바람이 살가워 절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봄볕과 봄바람을 맘껏 누리기 미안했다. 앞날 한 노동자가 자기 몸을 불살라 비정규직의 고통을 외쳤고, 그 이틀 전에는 한 노동자가 스스로 목매 하청노동자의 암울함을 전했다. 언제부턴가 나보다 어린 사람들의 죽음을 수없이 듣는다. 그날 오후 1시, 서울 인사동 남인사마당에서 ‘콜트기타 불매 선포 기자회견’이 열렸다. 2008년, 금속노조 콜텍지회장 이인근씨가 송전탑에 올라 ‘정리해고 철폐, 원직 복직, 공장 정상화’를 요구하며 삭발에 단식농성까지 했다. 회사도 사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송전탑에서 내려와 병원에 있던 그를 만난 지 5년이 지났다. 그 사이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투쟁, 250여차례에 이르는 가수들의 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