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한국정치에서 잊혀진 이름이 있다. ‘민중’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이른 하루를 시작해 고된 일을 하지만 시민으로서도 유권자로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다. 국정원 정치개입과 NLL 문제로 전직 대통령들의 이름 석자를 둘러싸고 여야가 난투전을 벌이기 직전, 제1야당 민주당이 소리 높여 외쳤던 ‘을을 위한 정치’로 ‘혹시’하며 잠시 기대감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였다. 을을 위한 정치에 집중하기 위해 상대방의 허물마저 품어 안음으로써 민생 정책을 관철시켜나가는 ‘정치다운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몽상이었던 것이다. 손에 잡히는 결과를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예외라면 예외라 할 수 있는’ 경우가 있긴 했다. 노회찬 진보정의당(현 정의당) 전 대표가 그렇다. 그는 삼성으로부터 떡값..
서울은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남쪽에는 순전히 서울 관점에서뿐인 이 장마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분들도 있다. 밀양의 주민들이다. 조환익 한국전력 사장이 “7월 장마철에는 공사 재개가 없다”고 말했다지만, 이 말을 8월이 되면 공사를 재개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주민들은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공사가 재개되면 송전탑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다시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이 폭염에 산을 올라야 한다. 현장에 있는 활동가들은 공사가 재개되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가장 겁난다고 한다. 이미 작년 6월 폭염에 공사를 반대하던 60이 넘은 어르신 세 분이 실신해서 병원에 이송됐고 올해 5월에도 30여명의 주민들이 병원에 이송됐다. 이계삼 송전탑대책위 사무국장은 나와 주고받은 e메일에서 ..
태안의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훈련받던 고등학생 5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세상에 아깝지 않은 목숨이 어디에 있겠는가마는, 채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생명이 스러졌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그 부모들의 극렬한 아픔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해 더 견디기 어렵다. 아이들을 죽이고 부모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 것은 구명조끼 없이 바다에 뛰어들라는 부당한 명령만이 아니었다. 더 직접적인 것은, 그에 후속된 무모한 집단적 순응이었다. 시쳇말로 ‘까라면 까는’ 것이 군인정신의 정수이자 남성다움의 본령이라는 믿음이었다. 국민들에게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신체’를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요 특징이고, 군대가 그런 신체를 만들어내는 가장 효율적인 기구였던 것도 보편적 현상이지만, 식민지 근대는 개..
새벽 3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가장 가까워진다는 시간. 어떤 남성이 계단을 걸어 오른다. 출퇴근을 반복하며 걷고 또 걸었던 계단이지만, 이 계단은 한 번도 올라보지 않았던 낯선 계단이다. 마침내 계단 끝. 옥상으로 연결된 문을 열고 한 발짝 더 내디딘다. 아직 새벽 공기가 차다. 아파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하나둘 켜지고, 신문을 잔뜩 실은 오토바이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아파트 입구에 서 있다. 거리에 나뒹굴던 쓰레기는 새벽 청소차 소리에 맞춰 하나둘 자취를 감춘다. 거실에 쓰러져 있는 소주병과 음식 받침대로 쓰던 입사원서엔 국물 자국이 어지럽다. 여전히 어느 한 곳에 발 딛지 못하고 부평초같이 떠다녔던 지난 3년. 엉킨 회로처럼 갈 곳과 머물 곳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또 다..
‘아, 아, 아, 아.’ 창밖에서 새가 운다. 처음 듣는 소리다. 누가 저리 울까. 밖으로 나가 보니 저 위 나뭇가지에 크고 검은 새 두 마리가 앉아 아, 아, 아, 아. 가만 보니 까마귀다. 당연히 까악, 까악 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아, 아, 아, 아, 운다. 이라는 그림책이 퍼뜩 떠올랐다. 새끼 까마귀가 우는 소리, 엄마 까마귀와 아빠 까마귀가 우는 소리, 이른 아침에 우는 소리, 마을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우는 소리, 즐겁고 행복할 때 내는 소리가 다 달랐다. 이를 죄다 구별해 그대로 소리 내던 아이가 책속에 있었다. 소리내기에 앞서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게 먼저였겠지. 나중에 자기에게 말을 걸어주는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이는 내내 다른 이들한테 놀림을 받고 따돌림을 당했..
“이제 더 이상 하청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님을, 기계에 속한 부품이 아님을 당당하게 보여주자.” 2003년 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한 하청노동자가 공개적으로 ‘비정규직 인간선언’을 하며 노조 결성운동에 나서자고 호소했다. 월차를 쓰려면 해고를 각오해야 하고, 일하다 화장실 가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고, 몸이 아파도 조퇴를 못해 컨베이어벨트에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가는 시절이었다. 하청 내부에도 차별이 있었다. 1만명에 달하는 사내하청 중 20% 가까운 2·3차 하청은 대부분 여성이었고 법정 최저시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었다. 노조 결성에 나선 하청노동자들은 처음부터 1차 하청과 2·3차 하청을 가르지 않았다. “우리가 2·3차 하청을 홀대한다면, 정규직이 하청 차별에 눈감는 것과 도대체 뭐가 다르겠는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정치관여죄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산되자 국정원은 느닷없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중 북방한계선(NLL) 관련 내용의 일부를 자의적으로 발췌, 요약해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에게 공개했다. 국정원의 불법 선거 개입과 6년 전의 정상회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국정원장은 친절하게도 ‘국정원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서거한 전직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한 발언과 국정원의 ‘명예’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인터넷 사이트에서 ‘댓글놀이’로 여론 조작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국정원 요원이 적발된 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관련 사실을 부인하다가 더 버틸 수 없자..
열차를 몰고 부산역을 출발해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저녁 노을에 물든 강이 아름다웠다. 2003년 6월28일에 해고된 한 기관사는 이제 꿈 속에서 그 길을 간다. 눈 뜨면 가슴이 아리다. 그해 해고된 이가 47명. 기관차, 승무, 정비, 역, 차량, 시설 등 일하던 현장으로 아무도 돌아가지 못했다. 단 하루라도, 복직해서 기관차를 몰고 싶었던 어떤 이는 해고 상태에서 정년을 맞아야 했다. 2009년 대량 해고까지, 철도노동조합 해고자는 모두 94명이다. 2003년에는 ‘노·사·정 합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철도 구조를 개편’하려는 정부에 맞서다가, 2009년에는 ‘공기업 선진화 정책을 추진’하려는 정부가 적법한 파업을 불법이라 몰아 세워서, 2007년과 2008년에는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