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에 걸린 글귀가 비구름처럼 글썽거린다. “그동안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이제 널 보내니 가난만 남았구나.” 봄꽃이 가을꽃보다 일찍 지듯 눈물이 바다보다 먼저 짠맛으로 흘러내린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걸 잃고 난 뒤, 맑은 국물에 소금이 풀어지듯 미래가 삽시간에 녹아 사라진 걸 안 뒤에야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다네. 손에 잡았던 것, 귀하게 알고 아꼈던 것들. 이런 모든 걸 잃고 난 뒤 사랑 없는 풍경은 참으로 황량만 하여라.” 팔레스타인의 시인 ‘나오미 시하브 나이’의 시를 베껴 적은 공책을 살짝 뒤적여본다. 송화가 핀 솔숲 그늘 아래 담요를 깔아놓고 소풍을 즐겼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Plaisir D’amour….”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로 듣다가, 트윈폴리오의 번안곡..
“허기진 들판 숨 가쁜 골짜기 어머니. 시름의 바다 건너 선창가 정거장엘랑 다시는 나오지 마세요 어머니.” 김남주 시인의 ‘편지’란 시에는 남녘땅 선창가의 안타까운 이별이 그려지고 있다. 미개한 게 아니라 순수해서, 교활하고 약삭빠르지 못해서, 너무나 느리고 착해서 만날 빼앗기고 만날 당하고 선창가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바보 같은 우리네 어머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 그 딸인 우리네 선량한 이웃들…. 노란 색깔 리본을 친친 감은 떡갈나무에 우리들 이름도 빠짐없이 적혀 있음이겠다.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 임이 돌아올 때 식별이 가능하도록 떡갈나무에 매어둔 노란 리본의 노래가 고딩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목소리처럼 흥겹게 춤을 추는데, 돌아오마 약속하..
태초에, 하느님 말씀 이전에, 침묵이 있었다. 세상의 고요는 착 가라앉은 아침 안개처럼 차분하고 안정적이다. 시골 사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조용하다는 것이다. 조용한 것이 즐거운 것인가 반문한다면 딱히 답을 드릴 말은 없다. 하지만 ‘즐겁다’란 표현은 ‘좋다’는 말보다 더 적극적인지라 대뜸 고집하고 싶다. 사람도 죽으면 고요로 돌아간다. 모든 죽음은 고요 속에서 참 안식을 누리게 된다. 되돌아갔다, 되돌아가셨다, 어디로? 고요함으로… 집터 닦는다고 기계소음이 괴롭히는 날도 있으나 대개 아무 방해 없이 조용한 편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전축에 노래도 듣고 그러는데 다른 잡음 없이 곱게 뽑아지는 소리에 황홀할 따름. 음악도 어쩌다 한번 작정하고 들어야 좋은 것이지 허구한 날 크게 틀어놓으면 소음에 ..
반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에 등장하는 할매를 꼭 빼닮은 송정댁을 면소재지에서 만났다. 둥근 고무 대야를 하나 사려고 나오셨단다. 묻지도 않았는데 부엌방에 비가 샌다는 말을 한숨에 섞어 보태시면서…. 입식으로 고친 부엌 천장 쪽에서 빗물이 찰찰 떨어지고 있나보다. 자녀들은 멀리 살고, 이장님은 봄 농사로 바쁘시고, 봄비는 간간이 할매를 괴롭히고 있음이렷다. 지붕 말고도 할머니 두 눈에 빗물이 뚝뚝 아니 똑똑 떨어지겠다. 영화 에 나오는 보안관 리틀 빌(진 해크먼). 현상금을 노린 총잡이들보다 백배천배 고약한 왈패인 보안관. 언덕배기에다 통나무집을 혼자 힘으로 지었는데 오만방자한 죗값인지 비만 내렸다하면 오만군데서 비가 샜다. 새집도 짓고 한번 살아보려고 했던 보안관은 늙고 병든 총잡이 윌리엄 머니..
벚꽃 진다. 하얀 두루마리 화장지가 돌돌 풀리듯 하얀 꽃잎이 쏟아져 날리고 첫눈만 같아 잠깐 좋았다가 끝인 걸 알게 되어 눈물이 찔끔. 벚꽃 지니 사람도 지는 건가. 할머니 꾸벅꾸벅 툇마루에서 졸다가 아예 방으로 기어들어가 이불 깔고 본격적으로 깊은 잠…. 춘곤증의 봄날이 고단한 인생을 위로하고 있음이렷다. 언젠가는 일어서지 못할 깊은 잠에 빠져드시겠지. 잠을 자는 시간이 아깝다는 사람을 만나고는 하는데 그런 소리 들으면 깜짝 놀라게 된다. 충분히 자고 충분히 뒹굴뒹굴 그렇게 ‘놀고먹으며’ 살아야지 너무 허둥대며 일중독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은 서글프고 가엽다. 고양이도 솔솔 자고 개도 늘어지고 일개미도 잠깐 허리를 펴며 드러눕는 시간. 봄날이라고 바깥일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정신없이 움직이지 말라고 춘..
나비를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축복인 봄날이다. 내가 너무 ‘트리비얼’하다고 꼬집진 마시길. 나비 멸종을 위해 시작한 듯한 4대강 개발 사업에 이어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또 무엇을 살리고 누구를 아프게 할 것인가. 용산참사가 자꾸 맘에 어룽거린다. 봄나비 노랑나비, 유채꽃 노란 바다를 건너 탱고를 추며 날아와 마당을 서성인다. 가르델의 노래인지 피아졸라의 연주인지 바람소리도 정열을 다해 불어온다. 구근식물로 지난가을 묻어둔 히아신스가 바람에 휘청거리며 진한 향내를 뿜어대면 꽃밭은 순간 밀롱가로 변한다. 탱고란 만진다는 뜻의 탁툼(Tactum)에서 비롯된 말. 꽃과 나무와 별과 강물과 안개, 벌레들의 반도네온 숨소리들…. 나비는 오동나무집 할매의 빨래에 앉았다가도 간다. 손등을 만지는 건 춤이고..
친구에게 “밥 한번만 먹자!” 약속하고선 봄볕처럼 토닥토닥 문자를 나눴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멀리 쿠바로 길을 떠나왔다. 밥 한번 먹자는 약속은 정말 허망한 약속 같다. 날을 잡고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놓아야 밥이 진짜 살과 피가 되는 것이렷다. 난 쿠바와 인연이 깊은가 보다. 이란 선곡 음반까지 냈고, 체와 사탕수수밭 농부들의 노래도 만들어 부르고…. 생태와 혁명의 도시 아바나와 시골마을에서 마시는 한 잔의 모히토를 사랑한다. 생선의 가시를 바르듯 상처들 속에서 나의 살점을 발라보는 시간.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게 사랑이 아니겠기에 훌쩍 길을 떠나는 것이다. 원앙은 암컷이 바람을 피울까봐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일종의 의처증이란다. 친구들 사이도 적당한 거리를 가져야 서..
봄바람이 살랑살랑. 몸뻬 치마도 팔랑팔랑. 처녀 가슴은 벌렁벌렁. 가진 것 없는 사람도 매화 피고 벚꽃 피면 잠깐씩 헤벌쭉 웃을 수 있는 봄날이렷다. 옛날깐날에 비둘기를 사냥하는 포수가 있었다. 산비둘기를 몽땅 잡아 그물에 가두고 시장에 내다팔 날만을 기다리는데. 그물이 촘촘하여 아무리 기를 쓰고 발버둥쳐도 오히려 날개깃만 숭숭 빠질 뿐. 통통하게 살찌워 비싼 값을 받으려고 빵이며 곡식이며 바가지로 던져주자 모두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단 한 마리 비둘기만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푸른 허공을 바라보며 울었다. 이 비둘기는 빼빼 마르기 시작했고 결국 그 그물망을 가볍게 빠져나와 솟구쳐 날아오를 수 있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 가운데 ‘힐 더 월드(Heal The World)’엔 이런 가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