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두릅 순을 따고 진달래를 꺾으며 다니던 뒷산. 찬 서리에 텅 비어 꿩이나 토끼가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뿐이구나. 북풍한설이 잠깐 물러나고 훤해진 산길과 들길. 보통 연초가 되면 며칠이라도 등산객들로 이 길이 북적거리곤 하였다. 마음조차 모두 얼어 버렸는지 썰렁한 새해벽두. 죄다들 지리산 노고단으로 가버린 걸까? 구례로 어디로… 덕분에 고즈넉한 산보를 다녀와 곱은 손을 난롯불에 녹이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아라. 할머니들은 봉쇄수도원 수녀님들 맹키롬(-처럼) 코빼기도 안 비치고 모두 숨어 지내네. 낮부터 테레비가 유일한 낙이요 외로움을 달래주는 동반자, 그런데 그 소리도 조용하다. “당최 보고 싶지가 않아부러. 즈그들만 좋다고 웃고 그라재 먼 내용인지도 통 몰르겄고….” 1월 해오름달, ..
월드뮤직을 모아 이란 선곡음반을 낸 일이 있었다. 그즈음 그리스에 다시 다녀왔는데, 아테네역은 우리 동네 버스터미널만큼 작고 허름해서 정겨운 역이었다. 기차를 타고 나는 사도 바울이 사랑의 편지를 써 보냈던 고린도 동네를 찾아갔다. 아그네스 발차의 목소리로 물리도록 들은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의 그 기차에 내가 타게 될 줄이야.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영원히 기억에 남으리. 카테리나행 기차는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네. 우리가 나누었던 시간들은 파도와 같이 멀어지고 밤은 찾아왔는데 당신은 오지 않아라. 당신은 오지 않을 것이네. 비밀을 안고 사라진 당신은 영원히… 기차는 멀리 떠나가고 나 홀로 역에 남았네. 이 슬픔을 가슴에 안고 서럽게 앉아 있네.”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사내를 사..
한 아기가 태어났다. 탄일종이 울리고 새들은 축하비행이다. 세상이 암만 어두워도 늠름하게 반짝이는 별들이 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달콤한 입술을 나누고, 연말에 그리운 친구들은 따뜻한 말씨로 안부 편지를 나누는 때. 나도 이렇게 당신 앞으로 연하장 하나 부치련다. 내 바로 위로 형이 한 분 계셨는데, 다운증후군 장애인이었다. 형은 아버지가 부임하는 교회마다 골칫거리였다. 교회가 부흥하긴커녕 쪼그라들기 일쑤. 축복받아야 할(?) 목사가 장애인을 낳았다며 캄캄한 데서 쥐떼처럼 수군거렸다. 몇 분은 대형버스까지 구입해 마을마다 샅샅이 훑어가는 읍내 큰 교회로 떠나버렸다. 거기 목사님은 누가 봐도 있어 보이는 거만하고 도도한 풍채였고, 자녀들도 모두 우등생에 말쑥한 차림새였다. 송아지를 좋아했던 형은 만날 송아..
에서 비행사 생텍쥐페리는 말했다. “그대가 때로는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고, 때로는 여기서 우는가 하면 저기서 웃곤 하는 건 모두 힘겨운 생을 치유하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올해 모두 분주히 참 애들 많이 쓰셨다. 울고 웃고 하면서, 아프게 핀 매화꽃부터 서늘한 눈꽃까지 모두 매만진, 굽이치는 세월을 건너온 우리들. 마을엔 간밤 내린 눈으로 순록의 뿔처럼 생긴 나뭇가지들이 새하얗게 손을 흔든다. 아침 기척들로 골목마다 또 한번 수런거린다. “수제 저봄(숟가락 젓가락) 잡을 심도 없이 누워가꼬 있었는디, 산사람 우그로 넘어댕기믄 송장 치룬다등만 그눔의 영감탱이가 밴소 간다고 새복에 어찌나 쎄게 등판을 볼바불고(밟고) 가부능가 암만해도 빙원에 가봐야 쓸 거 같단 말이여라잉.” 허리를 움켜쥔 할매가..
안개인 줄 알았는데 대륙 먼지라니, 좋다가 말았다. 안개 좋아하는데. 난 숨는 거 무지 좋아하는데. 어디 콕 박혀 사는 거, 잘 안 보이는 거. 하는 일은 많지만 대체로 나대지 않고 그렇게 살고자 애썼다. 그런데 염소들 한가히 풀 뜯던 들판에 서리만 홀로 하얀 것처럼 무언가 서리처럼 내 마음에 켜켜이 쌓이는 것이 있었다. 오뉴월 한이 서리처럼 내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오월 광주. 옛 도청 앞 분수대 곁에 광주정신으로 빚어낸 최초의 시민자생 예술공간 ‘메이홀’을 열어 그곳 관장 일을 보고 있다. 그래 가끔 행사 있을 땐 축사 한답시고 광주엘 나가곤 한다. 엊그제 쌀밥눈이 훠훠 내리던 날, 치과의사 형이랑 둘이 눈발을 헤치고 메이홀 근처 초밥집에 들렀었다. 쫄깃한 곤약과 유부, 굵은 무가 장국에 익혀진 ..
지난여름 나는 지구별 반대편 볼리비아에 갔었다. 그쪽은 우리나라가 여름일 때 겨울이고, 겨울이면 여름이 된다. 그러니까 난 겨울여행을 진작 다녀온 것이다. 이미 첫눈도 봤고, 부치지 못할 편지 사각사각 연필을 깎아설랑 밤새 쓰고 지우고, 당신이 많이 보고 싶었다. 남미에서도 그야말로 오지요 고립된 산동네 볼리비아. 평화라는 뜻을 지닌 수도 ‘라파스’는 체 게바라가 남미의 존엄과 해방을 꿈꾸며 싸우다 죽은 곳이다. 그러니까 체는 여기서 간첩이었고, 외국인 게릴라였다. 세상은 동전의 앞뒤가 바뀌듯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고, 어제의 거짓이 오늘은 진실로 밝혀지기 마련. 가만 있어도 숨이 헐떡거려지는 고산도시 라파스 입구엔 총을 든 체 게바라의 동상이 여행자들을 처음 반긴다. 대통령도 백인의 후손이 아니..
송년회가 벌써부터 시작되었다. 벌써부터도 아니지. 한 달밖에 안 남은 올해. 이곳 남쪽 사람들 송년회는 부어라 마셔라 무조건으로 막걸리렷다. 갓 담근 김장김치, 막 쪄낸 두부, 팔팔 찌개 하나 끓여설랑 막걸리를 한 순배씩 돌리고 나면 얼굴마다 훈기가 확 피어오른다. “올 한 해 고상들 많아부렀네잉. 한잔 쫙 찌크러부러(마셔). 아따메 냉기지 말고(남기지 말고) 말이시….” 막걸리 주전자에 근심 모두 걷히고, 주막은 밤새 찾는 이들로 북적북적. 야명렴(밤에 빛을 낸다는 전설 속의 발) 발자국들로 가로등조차 무색할 지경. 남녘교회에 머물 때는 성찬예식에 붉은 포도주를 썼는데, 추수감사절엔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대부분 좋아하셨으나 낯을 찡그린 분들도 계셨다. 성경에 써진 그대로 예수님 별명이 술꾼이요 먹보신..
봄뜰에 개나리가 샛노란 꽃대궐이더니 이 가을엔 은행나무가 곱절이나 더 진한 노란빛이로구나. 노랗다 못해 아예 황금빛이랄까. 프라하의 황금소로가 하나 부럽지 않아라. 세상살이가 싸구려 민박집 순례라서 이 정도 누옥에 이 정도 황홀경이면 본전은 뽑았다는 생각을 가져야 맞겠다. 천지간 떠돌며 굉장 만장한 볼거리를 찾아다니는데 결국엔 누구라도 어릴 적부터 정겹던 내 나라 내 강산, 익숙한 나무와 풀꽃, 어머니 장맛 젓갈맛에 귀결되고 말리라. 은행나무는 오늘 밤도 친근한 가로수 불빛이렷다. 시방 세계는 은행을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어둠처럼 가득 퍼져 있으나 은행나무와 더불어 생태주의를 지향해야만 별과 인간의 미래가 무탈할 것이리라. 군사 정권과 신자유주의 정권 내내 경제성장과 무한개발, 번영을 목소리 높여 외쳐 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