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 보러 서울로 향하는 버스터미널, 기차역, 공항에선 바리바리 담긴 음식물을 든 노부부를 흔하게 마주칠 수 있다. 아랫녘 우체국에 가면 박스마다 가득 넣은 음식물이며 애비 신으라고 장터에서 산 검정색 양말까지 택배로 부치려고 순서를 기다리고 계신 어르신들을 쉽게 뵙곤 한다. “애말이요. 요기 조깐 주소 잠 적어주시믄 고맙겄소잉. 이라고 칸이 작어가꼬 당췌 글자를 넣을 수가 없게 생개부랬응게 안 그라요.” 내가 대신 택배주소지 기입란에 글씨를 써드리기도 여러 번. 어기영차 들었다 놓으면 막 빻은 고춧가루의 진한 향과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훅훅 풍겨 나오고는 했다. 조정래의 엔 평양으로 길 떠나는 정하섭을 위해 소화가 눈물바람으로 준비한 음식 보따리 이야기가 나온다. “미숫가루를 만들고, 오징어를 구하고..
사람은 아플 때가 있고 건강하게 팔팔 뛰는 때가 있다. 장사도 잘되고 잘나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애써도 파리나 날리는 때가 있다. 그런데 회복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곁을 떠난다. 친구란 어렵고 힘든 때 같이 동행해주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좋은 일만 생길 때, 재물과 권세를 쥐고 있을 때, 경사에 달라붙어 아부조로 축하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많다. 운동선수들은 더 그런 거 같다. 부상 시기에 그 곁을 지켜준다면 얼마나 큰 위안일까. 한때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선수가 국적을 바꿔 부상을 말끔히 치료하고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일로 국민들 속이 어수선했다. 다른 사정은 잘 모르겠고, 아플 때 버림을 받으면 많이 서럽고 분할 것이다. 달면 가까이 하고 쓰면 뱉는 일들 때문에 세상 사는 맛이 곱..
대추차·모과차·생강차 중에 고르라 하면 전에는 모과차를 골랐는데 요샌 입맛이 변했는지 생강을 찾게 된다. 나이 들수록 생각이 많아져 생강을 찾게 되는 것일까? 맵다가 쓰다가 텁텁하다가 순하다가 얼굴을 찡그리게도 만들고 코가 뻥 뚫리게도 되는…. 천운영의 소설 에는 딸과 대립각을 세운 아버지, 생강처럼 갖가지 맛을 함유한 고문기술자 아빠가 등장한다. 실제 주인공은 야바위 속성 통신과정으로 목사가 되었다지. 최근 정원마다 빨간 꽃은 뿌리째 뽑아버리겠다며 기염을 토하신 영화감독 목사도 괴이한 물건이다. 나도 물론이고 목사 세계는 참 가지가지 맛들로 복잡한 생강 같아라. 천길 절벽 아래 성난 파도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인생마다 굽이굽이 곡절도 많고 난관도 연속. 나환자의 손을 보는 듯 뭉툭하게 잘리고 굽어진 ..
수십년 만의 기록적인 폭설이랬다. 까마귀가 흰 눈을 뒤집어쓰고 깍깍 울어대는 도쿄에서 빙판에 미끄러지며 일을 보았다. 우리나라 동해안은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나리타 공항은 비닐 깔개와 침낭까지 배급된, 제 시간 환승하지 못한 여행객들로 매우 혼잡하였다. 다행히 비행기는 나를 인천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일본보다 위쪽인 담양이 오히려 순한 봄바람 불고, 오키나와나 되는 것처럼 남국의 우쿨렐레 소리마저 ‘깔맞춤’이구나. 내 검둥개 차우차우, 이름도 우스운 마오쩌순이가 꼬리치며 반기는 집. 이 녀석도 흰 눈이 내리면 까마귀처럼 가만히 뒤집어쓰고서 열을 식힌다. 만주 벌판에서 살아야 할 개인데 더운 날씨엔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야. 털을 밀면 모기들이 또 가만 안 놔두고. 살며시 홑청 이불이라도 덮어주고 싶은..
황무지 국경을 넘나드는 이층버스는 들쥐도 살지 않는 폐가만큼 낡고 퀴퀴했다. 지린내가 담요에서 풀어진 보푸라기와 함께 실내를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칠레로 가는 국경버스, 수도 산티아고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 24시간이 넘게 걸리는 하염없는 직선 하이웨이. 페루의 남단엔 백인들이 훔쳐간 별들이 창공에 촘촘 박혀 있더라. 백인들의 전깃불은 감정 없이 뻣뻣하게 빛날 뿐이지 인디오의 별처럼 그렁거리지도 못하고 일렁거리지도 못한다. 게다가 버스에선 일체의 소리를 아갈잡이하고 틀어놓은 뚱딴지 같은 댄스 뮤직과 잔혹한 할리우드 영화가 고요와 평화를 사랑하는 성숙한 인류를 못살게 괴롭힌다. 친근한 자연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는질는질한 사람 냄새도 없는 직행버스. 그저 억지 잠이나 독서로 모면을 해야 할 밖에. 출..
누구 영감이 죽고 홀로되면 그 집에서 며칠 외롭지 않게끔 같이 있어주는 할매들. 상갓집 외등이 꺼지고 자녀들은 직장 때문에 서둘러 고향집을 나서도 주민들은, 이웃사촌들은 미망인의 곁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같이 한방에서 밥을 먹고 잠도 같이 며칠 자준다. 안쓰러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해야 진한 위로라 믿고 한마을에서 오래도록 의지하면서 살아온 분들. 자기를 생각하고 자기를 찾는 순간 사랑의 감정은 흐려지며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 것이다.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행위렷다. 내어주고 베풀고 뜻을 맞춰주는 것. 팔을 마주 걸어 팔짱을 낀 연인들은 얼마나 다스울까. 차라리 더 오래 겨울이었으면 좋겠다는 표정들이다. 힝~ 그것만은 절대 아니 되옵니당. 혼자이지 않으면 그대 바라볼 수 없어 몸은 떨어져 ..
하늘과 땅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과’가 있다는 대답은 유머 일번지 정답이겠고, 새가 있다는 답은 시인의 대답일 것이다. 나는 시인의 답을 정치인이나 학자의 답보다 신뢰하는 편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흠. 오늘 아침도 나는 새들의 염불, 새들의 찬송 소리에 눈을 떴다. 깊은 산중이라 다양한 종류의 새들이 살고 있다. 마을까지 내려온 건 배고픔 때문이리라. 마당의 돌들 위에 묵은 쌀들을 던져둔다. 나 혼자 배부르게 잘살면 무슨 재민가. 새란 말은 사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늘과 땅 사이를 메우는 존재.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 우리는 언제부턴가 새와 마음을 나누며 살지 못하는 거 같다. 그래서 하늘의 음성, 하늘의 심성과 멀어진 건지도…. 산촌에 눈이 내리면 가장 반가운 발자국..
면사무소 주변으로 거미가 구석마다 돌돌 집을 말듯 오종종 생겨난 가게들을 보자. 영화 에 나올 법한 작고 예쁜 우체국, 낮잠을 주무셔도 될 거 같이 심심한 파출소, 촌티 파마의 지존 샴푸요정 미용실, 떡보 아지매들의 쿵덕덕 방앗간, 검고 징그럽게 생긴 미꾸라지를 놓고 파는 부식가게, 선량한 아재가 하얗게 탄 연탄을 갈고 서있는 카센타, 유일하게 젊고 볼 빨간 멸종위기의 아가씨를 구경할 수 있는 농협이나 새마을금고, 탕수육에 짜장면 곱빼기 아니면 배달조차 안 해주는 중국음식점, 겨우내 화투판이요, 말버릇이 밉상인 복덕방 타짜 아재들, 무더기로 높게 쌓아두고 시음도 국그릇인 인심 짱 칡즙 장수, 다단계 사원교육처럼 일사불란 ‘주여! 삼창’으로 하울링 중인 장로교회, 수북 명물 왕갈비 식당 배부른 돼지가족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