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의 취지를 살려서 잘 추진하겠다.”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 정부가 자주 꺼내 쓰는 말이다. 선의를 담아 해석하면 ‘공익을 위해 설계한 정책이 올바로 작동하도록’ 정도가 되겠고, 다소 심술궂게 표현하면 ‘하던 대로 할래요’ 정도가 되겠다. 정책 하나를 설계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전문가가 등장해 훈수를 둔다. 무슨무슨 위원회가 꾸려지고 공청회와 사무관, 서기관, 과장, 국장, 실장에 차관, 장관, 국회까지 보고서가 끝없이 쌓인다. 여기에 10년 계획, 국정과제, 대선공약, VIP(대통령) 보고자료 같은 대목에 밑줄이 쫙 그어지고 나면 정책 하나가 정말 어렵게, 어렵게 만들어진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현실과 동떨어져 진짜로 정책의 취지 하나만 남는 일도 부지기수라는 점이다. ‘집은 투기의 대상이 ..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2003년 개혁국민정당 집행위원 회의에서 했다고 전해진다. 당원들이 당내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요구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훗날 그는 진의와 표현이 왜곡됐다고 해명했지만, 발화자의 본심과 관계없이 이 표현은 젠더 문제에 대한 ‘진보’ 일각의 태도를 함축하는 말로 남아버렸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의 잇단 성폭력 사건과 이에 대한 여권의 2차 가해를 보면, 미투 시대 이후에도 ‘해일과 조개론’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권을 획득하고 의회에서 다수당이 되는 일에 비하면, 일상의 성폭력 문제는 해변에서 조개 줍는 일처럼 한가하고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장류학자 제인 구달은 히스로 공항으로 가는 택시..
“기자님, 요즘 시각장애인들은 맥주 마실 때 ‘테라’만 먹습니다.” 지난달 취재차 방문한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사무실에서 시각장애인 이병돈 대표가 말했다. 기자가 의아해하자 옆에 있던 직원이 냉장고에서 테라 한 캔을 꺼내왔다. 이 대표가 캔의 음용구 근처를 손으로 더듬더니 뭔가를 찾았는지 환하게 웃었다. “다른 맥주는 ‘맥주’라고만 돼 있는데, 테라만 이렇게 ‘테라’라고 점자가 쓰여 있어요. 테라 캔은 슈퍼에서 시각장애인 혼자서도 고를 수가 있습니다. 이러니 고마워서라도 테라만 마시죠.” 그에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제품을 고를 수 있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고 기쁜 일이었다. 시각장애인 한솔은 지난 1월 유튜브 방송에서 시중의 음료들을 모아 점자로 구분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병에 빗살무늬가 있는 미에로화..
출범 원년인 1982년 프로야구의 캐치프레이즈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이었다. 프로야구는 바라던 대로 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는데, 프로야구 키움의 외야수 이정후가 그 사례다. 1990년대 스타 야구선수 이종범의 아들이기도 한 이정후는 10세이던 2008년 한국 야구대표팀이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TV로 본 ‘베이징 키즈’다. 그로부터 13년 후 이정후는 그 자신이 도쿄 올림픽 야구대표팀에 발탁될 만큼 재능과 실력을 갖춘 야구선수로 성장했다. 이정후의 재능을 하나 더 꼽자면, 그는 입만 열면 바른말만 하는 뛰어난 언변의 소유자다. 이정후는 올림픽 대표팀에 선정된 후 “우리도 국제대회에 나갔던 선배님들을 보면서 야구를 시작했다. 요즘 어린이들이 야구를 잘..
‘릴 미켈라’(@lilmiquela)는 틱톡에서 320만명이 계정을 팔로한 인플루언서다. 인스타그램 팔로어도 304만명이 넘는다. 19세 브라질계 미국인으로 앨범을 낸 가수이고 여러 패션 브랜드의 모델로 섰다. 수시로 SNS에 업데이트되는 일상을 보면 꾸미기 좋아하고, 친구와 노는 것이 행복한 여느 또래처럼 보이지만 사실 미켈라는 2016년부터 쭉 열아홉인 로봇, 영원히 열아홉 살인 가상 인간이다. 미켈라를 비롯해 LG전자가 개발한 ‘김래아’, 삼성전자의 3D 캐릭터 ‘샘’(Sam), 일본 이케아의 모델이었던 ‘이마’(imma) 등 인간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AI)은 적어도 플랫폼 안에서 진짜 사람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진화했다. 기기를 통해 현실의 인간과 소통하는 이들 가상 인간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이 지경이 된 것이 부동산 탓이라는 여당의 생각은 이제 ‘확신’을 넘어 ‘집착’으로 굳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10일 민주당이 “집값 문제를 해결할 혁신적 방안”이라며 발표한 ‘누구나집 5.0’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누구나집 1.0’을 본 적도 없는데, 왜 벌써 ‘5.0’인지 궁금한 점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송영길 대표의 친구가 하던 사업” “1만가구를 누구 코에 붙이나” 등의 논란도 일단 넣어두자. 정말 혁신적인 방법이라면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닌 건 맞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혁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임대 후 분양 방식의 주택공급은 늘 해오던 것이다. 이미 조성된 공공택지를 끌어다 집을 짓는다 하니 땅 문제에서 뭔가 대안을 제시..
지난 11일 오후 5시30분쯤 광주 동구청 광장에 이용섭 광주시장과 임택 동구청장이 나란히 섰다. 재개발 붕괴사고 희생자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곳이었다. 이들과 함께 공무원 여럿이 광장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기 오십니다.” 20분 뒤 한 공무원이 손가락으로 동구청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재난 직후, 현장은 숨 돌릴 틈이 없다. 사고 원인 규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관계 기관들은 전심전력을 다한다. 희생자 수습과 유가족 지원도 중요한 업무이다. 엉뚱한 곳에 힘을 쏟다간 ‘골든타임’을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재난 현장은 늘 ‘가욋일’로 바쁘다. ‘높으신 분’이 올 때마다 생기는 의전 때문이다. 정·관계 인사들의 방문은 부지기수고, 이들을 현장..
지난해 1월 터키 리그 소속이었던 ‘배구여제’ 김연경은 리그 일정을 뒤로하고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아시아지역 예선에 출전했다. 그는 예선 도중 복근이 찢어지는 불의의 부상을 입었지만 진통제로 통증을 달래가며 결승전에 출장했다. 그는 결국 한국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을 예선 우승으로 이끌었고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도쿄 올림픽 출전 티켓을 차지했다. 예선이 끝난 후 한국에 들어온 김연경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리그도 포기하고 여기에 ‘올인’했다. (복근 부상 때문에) 터키 리그에 가서 경기를 못하긴 하지만 너무 좋다. 구단 측이 뭐라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좋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는 예정된 게 아니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 여자프로배구 경기를 관람하러 왔던 김연경은 그를 발견한 기자들의 즉흥적인 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