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중을 들을 게 뻔하지만 밝히고 싶다. 나는 내년 대선 때 기권하기로 마음먹었다. 투표권이 생긴 이후로 꾸준히 선거에 참여했다. 찍고 싶은 후보가 명확한 적도 있었고, 당을 보고 찍은 적도 있었다. 당선 가능성은 적지만 지지하는 마음을 보태고 싶어 투표한 적도 있다. 점점 더 선택하기가 참 어렵구나 싶었지만 인생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냐고, 완벽히 마음에 드는 선택지 같은 건 없는 것이라고 다독였다. 투표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지? 왜 그래야 하지?’ 하는 마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답이라고 하기 어려운 보기만 주어진 객관식 시험에서 어떻게 답을 고르라는 걸까? 시험을 거부할 권리는 없는 것인가? 정답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답을 적어낸 뒤 괴로운 것과 시..
대한민국은 부동산으로 돈 벌기 좋은 나라다. 서울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면 1년 새 몇억원씩 집값이 오른다. 오른 집값에 비하면 보유세 부담은 ‘새 발의 피’이지만, 그래도 염려가 된다면 걱정할 게 없다. 정부가 알아서 보유세를 깎아준다. 종합부동산세는 부과기준을 올려 여간하면 내지 않아도 되도록 해줄 예정이다. 만일 내가 강남과 마포에 공시가격 30억원 이상(시가 약 43억원) 아파트를 두 채 이상 갖고 있어 부담이 된다면? 그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여기저기서 “다주택자를 죄인 취급하는 나라” “세금폭탄” 운운하며 난리다. 곧 정부가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제 집값이 오를 만큼 오른 것 같고, 분위기를 보아 하니 슬슬 매물이 쌓이는 것 같아 집을 팔고 싶다면 조금만 기다리시라. 오를 대로 오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리처드는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한 음식들을 먹으며 자란다. 부모는 지원과 관심을 쏟아붓고, 리처드는 좋은 학교에서 질 높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반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폴라는 어려서부터 병원을 드나들고, 맞벌이를 하는 부모를 기다리느라 늦게까지 혼자 시간을 보낸다. 열악한 학창 시절을 보낸 폴라는 대학에 가서도 학비를 마련하느라 쩔쩔맨다. 같은 시각 리처드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인턴십까지 경험한다. 몇 년 뒤 둘이 마주친 곳은 리처드의 성공 축하연. “노력했을 뿐”이라고 겸손해하는 리처드의 옆을 음식을 서빙하는 폴라가 어두운 표정으로 스쳐간다. 리처드와 폴라는 뉴질랜드 시사만화가 토비 모리스가 그린 만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노력을 통해..
3일 개봉하는 영화 에는 배우 쿠마일 난지아니가 연기한 킨고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숙적 데비언츠를 물리친 이터널스 멤버들은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킨고는 놀랍게도 발리우드 스타가 됐다. 이터널스는 나이를 먹지 않기에 킨고는 증조부 시절부터 배우 집안인 것처럼 행동한다. 다시 데비언츠가 나타나 이터널스로 모여야 한다는 소식을 듣자, 킨고는 발리우드 생활을 아쉬워하면서 말한다. “다음 영화에는 BTS가 카메오로 나오기로 했는데….” 이 영화에는 한국의 액션스타 마동석도 출연한다. 강한 완력으로 적을 무찌르지만 여성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그러면서 가끔 귀여운 면모도 보이는 영웅 길가메시 역이다. 마동석이 등 대표작에서 보여준 이미지가 그대로 재현됐다. 마동석의 극중 파트너는 할리우드 톱스타 앤젤리나..
페이스북에서 2년간 일했던 프랜시스 하우겐이 이달 초 페이스북의 비도덕성과 불법 혐의를 내부고발해 미국을 뒤흔들었다. 필자의 관심은 ‘그가 어떻게 페이스북이란 골리앗에 홀로 맞설 수 있었을까’였다. 여러 외신을 통해 찾은 답은 기여에 걸맞은 보상과 사회적·법적 지원이었다. 미국은 내부고발로 국가의 수익(합의금·과징금 등)이 발생하면 수익의 10~30%를 고발자에게 보상한다. 보상 비율은 기여도에 따라 정해질 뿐 액수가 높다고 비율이 낮아지지 않는다. 그 덕에 최근 도이체방크 금리조작 제보자처럼 2억달러를 보상받는 일도 가능하다. 미국에선 비영리단체들이 내부고발자에게 물리적인 신변 보호와 숙소·생활비를 제공한다. 변호사와 홍보 전문가들이 내부고발의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법적 분쟁에서 지지 않을 전략도 같이 ..
지난해 코로나19 탓에 124년 만에 처음으로 취소됐던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지난 12일 개최됐다. 이날 대회 현장에선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1966년 여성 최초로 보스턴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로버타 기브의 동상 제막식이 거행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1960년대는 대회 주최 측이 여성을 생리학적으로 무능하다고 간주하고 여성의 대회 참가를 불허하던 시절이었다. 기브는 대회 관계자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덤불 뒤에 숨어 있다가 경주가 시작되자 코스로 뛰어들었다. 오빠의 운동화를 빌려 신은 기브는 발의 통증이 심한데도 끝까지 달려 결승선을 통과했다. 역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55년의 세월이 흐른 2021년 일본에서도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따르면 도쿄 올림픽 출전 선..
언니, 잘 지내고 있나요. 2년 전쯤 언니에게 보낸 편지는 여전히 ‘읽지 않음’으로 돼 있지만 괜찮아요. 어쩌면 그 편지는 순전히 저의 위안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월이 돼서 그런지 요즘 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언니가 있던 곳에서 일어난 좋은 변화를 볼 때 더 그랬습니다. 여성들이 떼로 나와 축구를 하는 예능 프로그램(골 때리는 그녀들)과 여성 댄서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스트릿 우먼 파이터)이 큰 호평과 인기를 얻으며 방송되고 있어요. 앗, 이렇게만 설명하니 조금 걱정되죠? 운동이나 춤과는 상관없이 몸을 관음적으로 훑는 시선이나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편견을 부추기는 악마의 편집은 없어 보여요. 이 프로그램들을 보며 저는 여성의 몸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34-23-36’이..
하루에도 몇 개씩 새로 생성되는 문서 등 파일을 관리하는 방법이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새삼스럽게 화제가 됐다. 컴퓨터 안에 디렉터리, 즉 상위 폴더에서 하위 폴더로 가지를 치며 영역을 나눠 저장했던 그간의 상식이 바뀌었다는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드라마 에서 인턴사원 장그래는 뒤죽박죽 나열돼 있던 파일들을 마인드맵까지 그려 분류 작업을 끝낸다. 갈피를 잃은 파일들이 각자의 폴더에 묶여 마음속 평화를 찾은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뿌듯한 표정으로. 정작 회사 매뉴얼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일 처리를 했다며 상사에게 크게 혼이 나지만 말이다. ‘직박구리’ ‘할미새사촌’…. 이런 단어가 익숙한 이들은 ‘새 폴더’ 이외의 파일 정리 대안이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당연한 줄 알았던 디렉터리는 디지털 기기와 ..